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90년…민주화운동 참여, 통일운동 물꼬
유신치하 횃불 '목요기도회', 기독교 통일운동 척도 '88선언'
(서울=뉴스1) 염지은 기자 | 2014.09.16 05:30:00 송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김영주 목사)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세계교회가 합의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 공동기도주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남북공동기도회를 평양 봉수교회에서 열고 있다.(NCCK제공) 2014.08.15/뉴스1 2014.09.15/뉴스1 © News1 염지은 기자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 배경을 갖고 교파형 교회로 전래됐던 한국 교회는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개신교교회를 조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4개의 장로회 선교부와 2개의 감리회 선교부가 협의체인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1905년에 결성했다.
하지만 이는 선교사들의 호응에도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1924년 9월 24일, 선교사 중심의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와 한국교회가 주체인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통합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새문안교회에서 창설됐다. 이것이 현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모체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현재 9개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정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루터회)과 5개 연합기구(CBS, 대한기독교서회,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WCA연합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의회는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규칙에서 ▲ 협동하여 복음을 선전함 ▲협동하여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협동하여 기독교문화를 보급케 함을 목적으로 천명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일치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한국교회는 20세기 초부터 다양한 세계 에큐메니칼(교회일치)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현대 선교운동과 교회일치운동의 전환점이 된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윤치호가 비공식적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이 대회는 '계속위원회'를 구성했고 후에 국제선교협의회로 발전했다. 이러한 세계적인 상황 속에서 공의회는 국제선교협의회의 산하기구인 국가단위의 에큐메니칼 조직으로서 역할하게 됐다.
공의회는 창립 당시에는 한국교회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미북감리회, 조선미남감리회가 참여했다. 외국 선교부로는 미북장로회,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연합장로회, 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가 가입했다. 기교기관으로는 대영성서공회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참여해 11개 단체 대표들로 조직됐다.
공의회는 이후 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이름을 바꿨다. 1937년 해산될 당시에는 11개 회원단체 외에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조선예수교서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재일본 캐나다장로회선교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도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이전에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각종 사업에 참여하면서 선교사 의존시대를 벗어나 한국인이 주체가 되는 한국교회 형성에 이바지했던 공의회는 일제말 폐쇄돼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라는 단체로 변모됐다. 한국교회는 1945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되고 말았다.
해방과 함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해체되고, 1946년 가을 교파연합운동 기구인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됐다.
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꾼다. 연합회는 1948년 9월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송해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해방이후 직면한 전쟁과 분단 등 연속적인 국가적 혼란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적 노력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와 합병해 산하기구인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가 되었는데, 이는 선교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가 광의의 선교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기독교연합회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로 변화된다.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등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한 회개없이 정권과 유착했다. 이승만 정권에 이어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했으며 이후 한국교회는 삼선개헌에 대한 찬반으로 크게 양분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기독교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계기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교단들과 교회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이 해 7월 11일부터 소장파 목사들과 구속자 가족들,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목요기도회'가 시작됐고 1974년 5월 4일 '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한국사회의 인권을 대변하는 역할을 시작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에 맞서 1976년 1월 15일 '목요기도회'를 부활시켰다. 이후 목요기도회는 유신치하를 밝히는 횃불의 역할을 감당했다.
한편 유신정권은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 '엑스플로 74', '77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의 기독교 대형집회를 지원하며 한국에 종교자유가 있음을 선전했다. 정권의 지원을 받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민주화 운동을 용공으로 비난하며 군사정권의 정치적 지지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의 가혹한 탄압에 대항해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정부의 간섭으로 통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함으로 1970년대 이후 통일논의는 고착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2월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정권의 강력한 탄압에도 1985년 3월 제34차 총회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선언'을 채택한 것을 시작으로 1988년 2월 29일 열린 제37차 총회에서는 조국의 통일문제를 두고 고민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회원교회들의 의견을 수렴해 통일에 대한 고백적인 내용을 담아 우리 민족과 온 세계 앞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내놓았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은 한국교회가 그동안 진행시켜온 통일 논의를 종합 정리한 것이다. 이제까지 진행된 통일 운동의 성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한 기독교 통일운동의 척도였다. 이 선언으로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의 통일 논의도 본격화 될 수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90주년은 비록 교단마다 선교 전통이 달라 때로는 분열의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인 한국교회적 상황에서 '교회협'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하나의 교회정신을 유지해온 결실이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군사독재의 엄혹한 시절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힘을 얻고 흩어지는 산실 역할을 했으며, 사회적 약자들이 기댈 수 있는 둥지의 역할을 감당하려 노력해 왔다.
또한 민족의 시급한 과제임에도 권력의 통제 안에 들어있던 통일에 관한 논의를 시작함으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 등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교회 연합과 갱신에 노력하고 있다. 향후 교회 안으로는 교회개혁의 기치를 들고, 교회 밖으로는 안에서 모아진 그 힘을 바탕으로 사회를 향해 약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생명과 정의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senaj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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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김영주 목사)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세계교회가 합의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 공동기도주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남북공동기도회를 평양 봉수교회에서 열고 있다.(NCCK제공) 2014.08.15/뉴스1 2014.09.15/뉴스1 © News1 염지은 기자 |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 배경을 갖고 교파형 교회로 전래됐던 한국 교회는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개신교교회를 조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4개의 장로회 선교부와 2개의 감리회 선교부가 협의체인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1905년에 결성했다.
하지만 이는 선교사들의 호응에도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1924년 9월 24일, 선교사 중심의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와 한국교회가 주체인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통합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새문안교회에서 창설됐다. 이것이 현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모체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현재 9개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정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루터회)과 5개 연합기구(CBS, 대한기독교서회,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WCA연합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의회는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규칙에서 ▲ 협동하여 복음을 선전함 ▲협동하여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협동하여 기독교문화를 보급케 함을 목적으로 천명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일치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한국교회는 20세기 초부터 다양한 세계 에큐메니칼(교회일치)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현대 선교운동과 교회일치운동의 전환점이 된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윤치호가 비공식적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이 대회는 '계속위원회'를 구성했고 후에 국제선교협의회로 발전했다. 이러한 세계적인 상황 속에서 공의회는 국제선교협의회의 산하기구인 국가단위의 에큐메니칼 조직으로서 역할하게 됐다.
공의회는 창립 당시에는 한국교회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미북감리회, 조선미남감리회가 참여했다. 외국 선교부로는 미북장로회,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연합장로회, 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가 가입했다. 기교기관으로는 대영성서공회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참여해 11개 단체 대표들로 조직됐다.
공의회는 이후 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이름을 바꿨다. 1937년 해산될 당시에는 11개 회원단체 외에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조선예수교서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재일본 캐나다장로회선교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도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이전에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각종 사업에 참여하면서 선교사 의존시대를 벗어나 한국인이 주체가 되는 한국교회 형성에 이바지했던 공의회는 일제말 폐쇄돼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라는 단체로 변모됐다. 한국교회는 1945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되고 말았다.
해방과 함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해체되고, 1946년 가을 교파연합운동 기구인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됐다.
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꾼다. 연합회는 1948년 9월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송해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해방이후 직면한 전쟁과 분단 등 연속적인 국가적 혼란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적 노력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와 합병해 산하기구인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가 되었는데, 이는 선교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가 광의의 선교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기독교연합회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로 변화된다.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등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한 회개없이 정권과 유착했다. 이승만 정권에 이어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했으며 이후 한국교회는 삼선개헌에 대한 찬반으로 크게 양분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기독교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계기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교단들과 교회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이 해 7월 11일부터 소장파 목사들과 구속자 가족들,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목요기도회'가 시작됐고 1974년 5월 4일 '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한국사회의 인권을 대변하는 역할을 시작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에 맞서 1976년 1월 15일 '목요기도회'를 부활시켰다. 이후 목요기도회는 유신치하를 밝히는 횃불의 역할을 감당했다.
한편 유신정권은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 '엑스플로 74', '77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의 기독교 대형집회를 지원하며 한국에 종교자유가 있음을 선전했다. 정권의 지원을 받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민주화 운동을 용공으로 비난하며 군사정권의 정치적 지지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의 가혹한 탄압에 대항해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정부의 간섭으로 통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함으로 1970년대 이후 통일논의는 고착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2월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정권의 강력한 탄압에도 1985년 3월 제34차 총회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선언'을 채택한 것을 시작으로 1988년 2월 29일 열린 제37차 총회에서는 조국의 통일문제를 두고 고민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회원교회들의 의견을 수렴해 통일에 대한 고백적인 내용을 담아 우리 민족과 온 세계 앞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내놓았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은 한국교회가 그동안 진행시켜온 통일 논의를 종합 정리한 것이다. 이제까지 진행된 통일 운동의 성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한 기독교 통일운동의 척도였다. 이 선언으로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의 통일 논의도 본격화 될 수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90주년은 비록 교단마다 선교 전통이 달라 때로는 분열의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인 한국교회적 상황에서 '교회협'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하나의 교회정신을 유지해온 결실이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군사독재의 엄혹한 시절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힘을 얻고 흩어지는 산실 역할을 했으며, 사회적 약자들이 기댈 수 있는 둥지의 역할을 감당하려 노력해 왔다.
또한 민족의 시급한 과제임에도 권력의 통제 안에 들어있던 통일에 관한 논의를 시작함으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 등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교회 연합과 갱신에 노력하고 있다. 향후 교회 안으로는 교회개혁의 기치를 들고, 교회 밖으로는 안에서 모아진 그 힘을 바탕으로 사회를 향해 약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생명과 정의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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