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4편 30절, 요한복음 6장 39절, 요한계시록 21장 5절)
생명은 캄캄하고 차가운 어둠 끝에도 새 아침을 열어냅니다. 생명은 온기를 지닌 피가 돌게 만들며, 여린 몸으로도 숨을 쉴 수 있게 만듭니다. 또 사랑은 변화, 곧 새롭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지금 2024년을 맞이하는 이 고갯길에서 찬연히 솟아오르는 또 다른 100주년의 태양을 바라봅니다. 지난 1924년부터 100년의 동행은 놀라우신 주님의 은총에 휩싸였던 역사였습니다. 회원 교단의 적극적이고 뜨거운 참여, 그리고 북녘교회와 맺어온 화해와 평화의 인사 또한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전쟁과 분단, 불신과 적대의 철조망을 걷어내는 엑소더스 자유와 해방의 나팔소리를 우리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 세계교회와 나란히 손을 잡고 어엿한 일원으로 일어섰습니다, 구호 받는 나라에서 이제는 구호하는 나라로,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이 가파른 속도로 붕괴 되고 있는 기후 재난, 인류적 위기를 몰고 온 역병의 재난, 부와 가난의 극명한 대비를 보이는 양극화는 우리 사회에 어둡고 차가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모아 ‘새롭게 하소서’ 기도하듯, 우리의 손과 발도 움직여 직접 행동에 나서기를 원합니다.
저는 ‘소하고 순하여라’는 깃발 아래, 서양의 외래 선교부에 뿌리를 두지 않은 자생적 토착교단 기독교대한복음교회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바위 한 모퉁이에 있는 너 작은 솔, 암상소송”,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작은 소나무’와 같은 운명의 존재는 오로지 하늘을 우러르고 의지할 따름입니다.
또한 이 작고 야무진 생명은 존재가 섬세하며 그 본연이 생태친화적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은 정성을 귀히 여기라, 기독인은 작고 낮아지라’는 창립자 최태용 감독님의 ‘암상소송’의 경구를 가슴에 새기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의 약자/소수자들을 혐오차별하고 정죄하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성장주의 외형적 규모에 한 눈 팔지 않으며 작고 여린 생명들을 보듬고, 뒤쳐진 이들에게 ‘동행의 속도, 동반의 시간’을 선물하는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기후위기 비상행동 10년 사업‘은 지구 생태계 복원의 첫 삽이며, 위기 대응의 ‘진면목’이 되어야 합니다. 기후 대응에 최선을 다하고, 교회의 다각적 참여를 확대시켜 나가겠습니다.
교회협은 그간 세계교회의 아낌없는 지지에 힘입어 한국전쟁 종전, 평화협정 체결에 혼신을 다해왔습니다. 전쟁은 생명의 터전을 파괴합니다. 전쟁의 막다른 길이 아닌 평화와 생명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때 비상한 외교와 끝없는 인내, 그리고 우리 가슴 가득 민족애와 인류애, 사랑을 채워 넣어야 평화는 가능합니다.
한편 사회의 경제적 불균형과 양극화는 사회 약자, 소수자, 주변인들을 외면하고 벼랑 끝으로 내모는 중입니다. 지금은 경쟁과 포식이 아닌 나눔과 공생의 샬롬을 선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뜻과 힘을 한데 모아 빈곤과 소외,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솔선수범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100년은 연합 정신에 동의하는 길동무들을 찾아 만나고, 그들과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데도 힘쓰겠습니다. 다가오는 100주년 행사를 잘 준비하겠습니다. 경제와 생태 정의 문제를 놓고 씨름하겠습니다. 증언이란 순교적 의미로서의 그리스어 마르투스(Martus)에 기원합니다. 예, 아니오를 할 때 순교적 각오로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흐트러져 길을 잃은 세태에 순교적 증언이 필요합니다.
새 시대의 에큐메니칼 패러다임은 이런 공동의 증언과 함께, 상생/공생의 경제와 생태환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교회협이라는 에큐메니칼 연대의 공간에서 함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100주년을 축하하고 전진해 나갈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안에서 향기로운 생명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2023년 11월 20일 회장 윤창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