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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living letter 기행...3

입력 : 2009-08-24 01:44:32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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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비행기

“south ? north ?”

짐바브웨에 있는 동안 어디를 가나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남쪽이냐 북쪽이냐. 북한과 오랜기간 관계를 맺어서인지 북한을 ‘코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남한에서 왔다고 하면 다시 질문하는 것이 반복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용기조목사의 나라”라고 하면 다 알아듣는 것이다. 그것이 확인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라는 것을 묻지 않았다. 누군가 개인을 통해 내 국적이 확인된다는 것이 적잖이 기분이 그랬지만, 그것은 내 사정이고 나를 만나는 분들은 이미 ‘그 분’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돈이 많고, 기독교인들이 많고, 모두 열성적인 기독인일 것이라는 추측 개인적으로 나는 이미 1997년 멕시코 프로그램 참여할 때 경험을 했고, 2003년 미얀마 방문 했을 때도 ‘그분’으로 대표되는 엄청난 파급력을 경험한 바 있어 새롭거나 놀랍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 켠이 여전히 허전했다.

이렇게 해서 내 국적이 확인되면 “도와줄 수 있나요?”라고 공식적인 만남이 끝난 후 개별적 요청이 들어왔다. 2003년 미얀마에서는 한 청년이 자신의 교회에 나를 데리고 가서 장장 한 시간이 넘도록 ‘그 분’에게 감동받은 것을 설명하고 자신은 꼭 한국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며 한국에 가게 해 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답을 해 주지 못하는 나는 집 주소만 받고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싸~하다.

블로와요 만남이 끝나고 밖에서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교회 담임 목사님이 현재 제일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교통수단]이라고 하면서 ‘자전거’지원이 가능할지를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자전거 한 대에 짐바브웨 현지에서는 100달라,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경지대에서는 50달라면 가능하다고 했다. 교회 청년들이나 학교 통학을 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2006년인가 불교 청년단체와 함께 태국-미얀마 국경지대 학교에 ‘헌 컴퓨터’를 보내려고 했는데 태국정부의 거부로 좌절된 적이 있어, 그 목사님께 ‘헌 자전거’를 보내면 받을 수 있다고 물었더니 정부에서 허가를 안 해 줄지도 모르니 현금지원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위 사진과 같은 주소를 적어 주었다.

현장을 방문하면 항상 벌어지는 일이지만 여전히 이런 부탁에는 마음이 무겁다. 그들 앞에 서 있는 나는 잘사는 한국에서 오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나 한국에 돌아오면 중산층에도 끼지 못하는 현실을 알리 없는 그들에게 뭐라 설명 할 길이 없고,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마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도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비행기’를 타고 온 나에게 ‘자전거’를 부탁하는 그 손길에 나는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 (민족해방영웅에서 독재자로)

Robert Gabriel Mugabe (현 짐바브웨 대통령)

1923년에는 영국 연방 안의 자치식민지가 되고 1953년에는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와 니아살란드(현재의 말라위)와 함께 로디지아 니아살란드 연방을 구성하지만 1963년 잠비아와 말라위가 독립하면서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1965년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전선 당이 소수 백인이 장악한 국회에서 모든 의석을 차지하고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영국은 이를 위법이라 선언하고 제재를 가하였고 이웃국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마저도 로디지아의 일방적인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이언 스미스가 이끄는 소수 백인 지배에 대항하는 ZANU와 ZAPU 등의 반군의 게릴라 투쟁이 심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75년 모잠비크와 앙골라가 독립하면서 지역 정세가 바뀌자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도 로디지아 정부를 설득하여 결국 1979년 영국의 식민지로 복귀했다. 그리고 1년 후, 1980년 4월 18일 다수인 아프리카인이 지배하는 짐바브웨로 독립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C%A7%90%EB%B0%94%EB%B8%8C%EC%9B%A8)

** 미국의 입장에서는 무가베든 누구든 ‘반미’는 독재며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정권이다. 여기서는 미국의 입장을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밝히며, 나름 느낀 것을 나누고자 한다.

현재 독재자로 세계의 지탄과 내부적 저항을 받고 있는 무가베는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ZANU를 주도]하였던 인물이고 독립영웅으로 1988년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현재까지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 묵었던 호텔의 현관에는 위 사진과 같은 번쩍이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수상이었을 때 ‘홀리데이 인’이라는 호텔이 문을 열었고 이를 기념하는 현판에 독립영웅의 이름이 적혀있다.

만남을 통해 들은 두 가지 이야기가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는데,

한 목사는 인권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영국 식민지였을 때는 연행하고 재판하고 감옥에 가두기는 했어도 죽이지는 않았다. 그때가 오히려 그리울 정도다”라면서 무가베 정권의 인권 탄압현실을 비난했다.

블로와요 교회의 어느 여자 분은 “영국 식민지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굶어 죽지는 않았다”라고 무가베 정권의 실정을 비난했다.

어떤 이는 무가베가 살고 있는 대통령궁에는 방이 100개가 있다고 하고, 부인이 샐 수 없다며 무가베의 부정부패를 은근히 비난했다.

민족독립의 영웅에서 독재자가 된 무가베는 아직도 권좌를 떠날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고 영구 집권을 노리는 것이 분명하고 더 나아가 [무가베 왕조]를 세우려고 하는 듯 보였다. 무가베가 버티고 있는 가장 큰 동력은 ‘민족해방군인’이었던 재향군인회와 지주들이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민족해방의 주역이 나라를 맡아야 한다”는 것. 어디서 많이들은 구호였다. 북한의 구호였고 남한의 구호였다. 남한의 경우 친일부역자들이 ‘민족해방의 주역’으로 둔갑을 하기도 했지만 구호는 동일했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이름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민중]을 억압하는 웃지 못 할 현실의 짐바브웨를 보면서 북한과 남한의 상황이 자꾸 오버랩 되는 이유는 뭘까?

한민족의 부흥을 말하면서 용산참사를 자행하는 정부의 논리가 웃기게 들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왜 다들 한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자신들의 업적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영속시키려는 것일까? 그것도 피를 보면서까지.

박수칠 때 떠나면 좋은 뒷모습이라도 남을 텐데.

이런 질문과 생각이 머리를 뱅뱅 돌다가 마지막 한 질문이 가슴에 꽂혔다.

“그럼 너는??”



아~ 난 자랑스런.??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라고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자랑스럽게 외우던 시절의 벅차오르던 기분이 다시 살아오는 [기분 더러운] 경험을 했다. 짐바브웨 방문 후기를 쓰던 중 아시아태평양지역기독학생회 인권워크샾이 방글라데시에서 있어 일주일 참가하고 다녀왔다. 그곳에서도 예외 없이 삼성의 간판을 보았다. 이 둘을 다시 생각하면서 9번째 후기를 쓰게 되었다.

조국의 자랑스러움과 벅차오름을 강렬하게 경험한 기억은 ‘국민’학교 때 건물과 건물사이에 단군으로 보이는 수염 난 할아버지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너는 조국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혼내는 듯한 표정을 한 그림을 보면서 “맞다!! 조국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이 있을거야!”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강렬하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곳곳에서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고 멈춰 서서 국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을 향해 가슴에 손을 올렸던 기억이 여전히 강렬하다.

그럴 정도의 강렬함은 아니지만, 아프리카 그것도 이름도 낯선 짐바브웨라는 곳에서 첫날 마주친 [골드스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소속감이 느껴지기에는 충분했다. 비행기로 17시간이나 날아와야 하는 곳에서 마주친 ‘골드스타’, 나도 모르게 바로 사진기를 들고 찍어댔다. 이유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글라데시 시골마을로 향하는 작은 시장이 있는 곳에서 발견한 삼성간판. 역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진기를 눌렀다. 왤까? 자랑스러움 ? 신기함?

자본의 진출이 나의 기쁨이 되는 이 ‘짱#$%나는’ 기분은 뭘까? 이 더러운 기분

하늘로 날았다 떨어지는 이 기분, 느껴도 되는가라고 스스로 질문을 해야 하는 어정쩡한 기분.가슴과 머리가 따로 국밥이 되어 버리는 이 수습 안되는 상황

기억을 떠올리는 현재도 여전히 그 찝찝함이 묻어오는 것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