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설명)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만난 교회 지도자들, 정 중앙 "멘사" 주교
4. “WE are now.” ~~~ “so that we need."
짐바브웨 탐방일정 대부분이 지역 목회자들, 교회 지도자들과의 만남이었다.
수도 하라레와 제2도시 블라와요에서 모두 교회 지도자들과의 만남이 주를 이뤘고, 블라와요에서는 2시간씩 3번에 걸쳐 연속으로 만나기도 했다. 방문단의 대표역할을 전아프리카교회협의회 동부지역 부의장이면서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인 ‘멘사’라는 분이 담당하셨는데, 그는 이미 가나에서 유명한 감리교 주교(한국에서는 감독이라고 부른다)의 한명이었다.
교회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어색하지만 한국에서도 익숙한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자신의 지위보다 높은 지도자에 대해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었다. 당연한 듯 하면서도 뭔가 ‘오바’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의 위계질서는 ‘평신도’인 내가 왜 여기 있을까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만들었다.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이 부분이 눈에 띠었다. 시작할 때 “WE are now”로 시작해서 “we need.”로 끝을 맺는 패턴이었다. 물론 방문팀의 목적중 하나가 짐바브웨 교회에 어떤 지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너무 귀에 자주 들리는 ‘그 말’에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도자들은 짐바브웨 상황을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였다. 단연 돋보이는 분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상황분석을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1.2.3’짚어가면서 잘 설명해주었다.
내용은 큰 차가 없을 정도로 비슷하였다. 무가베 정권에 의한 정치적 활동 억압과 반대파에 대한 무차별 숙청, 테러. 교회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간의 살인이 날 정도의 정치적 대립상황. 자국화폐가 화장지가 되는 경제상황. 교육을 받을 수 없고 국민들의 불안이 증가하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주를 이루었다. 이미 CNN이나 국제뉴스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현지 목사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생생함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목사들의 분석에는 어디에도 교회 구성원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없었다. 목사들은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런 저런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했지만, 그 교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석과 처방 외에는
목사들의 말하는 [WE]에는 평신도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들어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대다수가 차를 몰고 왔으며,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통화, 문자를 했고, 통화를 마치면서 통화료가 너무 비싸서 힘들다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목사들과 지도자들에 대한 막연한 반감인지 몰라도 그들의 브리핑에서는 교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교계 지도자들과의 마지막 모임에서 ‘불끈병’이 도졌다. 손을 들고 발언권을 신청해서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들의 분석 속에는 교인들의 목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친절한 금자씨’의 천사가 지나가는 침묵과 함께 날카로운 분석을 했던 목사의 눈매가 나를 응시하였다.
분위기가 싸~ 해지자, 구원병 ‘멘사’님이 나의 이야기를 덧붙여 설명하면서 “교인들의 삶의 이야기도 필요할 듯 합니다”라고 도와주었다. 그 뒤로 나는 말을 하지 않았고, 목사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분석을 다시 이어갔다.
‘ABC8.잘 알지도 못하면서가만있을걸.’

(사진설명) 블라와요 지역에서 만난 교회 여성들
5. [나]들의 이야기
가장 먼저 교회 여성들이 교회 밖으로 나와 찬송가를 부르며 우리 방문팀을 맞이하였다.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보던 역동적인 아프리카 찬송과 율동을 보면서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구경하듯 사진기만 눌렀는데, 나중에는 몸을 함께 흔들면서 인사를 할 정도로 ‘빨려드는’ 역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현실 삶에서 나온다고 믿어지지 않는 밝은 기운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현실의 고단함으로 바뀌었다.
목사들이 ‘우리’로 시작하였다면 이들은 “나”로 시작하여, 우리 가족으로 맺으며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눈물로 호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남편은 없고 아이들과 살아온 지 50년이 훌쩍 넘었는데, 이렇게 살기 힘들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집에 돈이 쌓여있지만, 휴지만도 못하다. 어디서 쓸 수도 없다. 식민지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할머니의 이야기)
‘직업훈련이 필요하다. 학교에 갈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나도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학비를 낼 수 없을뿐더러, 집안일도 해야 하니까. 돈 벌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젊은 여성의 이야기)
‘혹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주세요. 주소라도 알려줄 수 있나요? 한국가면 돈 많이 벌수 있나요?’ (한국 이주노동을 희망하던 남성 청년의 이야기)
대개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걱정했고,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가족을 걱정했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짐바브웨 정치의 무능함을 비난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사들의 분석과 다른 느낌을 받았고 여성들의 눈물과 남성들의 분노에서 짐바브웨 무가베 독재 정권의 무자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대다수가 영어를 하지 못했고, 교회 목사의 통역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이들은 영국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서 젊은 시절을 보냈을텐데도 영어를 하지 못했다. 식민지에서도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작년 어느 모임에서 “말레이지아가 영국의 식민지여서 난 좋았다고 생각한다”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청년을 만났던 때와는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이 분들은 영어로 돈을 벌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구나’
그 와중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통역을 하던 목사 한명이 통역이 아니라 해설을 하고 이야기한 여자 교인에서 설교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울며 이야기하던 여성은 나중에 “할렐루야”로 말을 맺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통역하던 목사를 ‘째’려봤지만 그는 당연한 듯 설교를 이어갔다. 물론 내가 보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지만.
생생한 목소리에 대한 반가움과 정권과 국가에 대한 짜증남, 목회자의 가르치려드는 공격적 태도에 여러 감정과 생각으로 꽉 찬 가슴을 털어내려고 나왔다가 다시 교회로 들어가니 여성교인들이 준비한 찐호박이 나왔다. 정말 맛있게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마음이 쓰렸다.
‘이 호박이 한 식구 하루 식사지만, 외국에서 오신 귀한 분들에게 대접하려고 가지고 왔다’는 말이었다. 둘러보니 그들의 손에는 호박이 아닌 옥수수가 들려 있었다.
6. 복장과 모자가 나에게 말해주는 이야기

(좌)교회 신자들 함께 찍은 사진 (우)중국 소수민족의 의상
위 사진 중에 다 함께 이야기가 끝난 후 헤어지지 아쉬워서 찍은 단체 사진을 보면 공통 유니폼을 입은 여자분들이 보인다. 남자들은 평범하다고 말할만한 양복이지만 여성들은 저마다의 특색을 드러내는 복장을 하고 있다.
처음 보자마자 ‘자신의 부족을 나타내는’ 복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시간이 지나고 어떤 부족을 나타내는 복장이냐고 묻는 나는 ‘크게 잘못 짚었다’.
아시아의 중국이나 태국, 미얀마 등에서 소수민족을 구분하는 것은 언어와 함께 바로 구분할 수 있으며 자긍심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 의상이며, 미얀마에서 많은 소수민족을 만나면서 그 구분법에 익숙해진 나는 당연히 짐바브웨에서도 부족 구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화를 하기도 전에 바로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구별에서 차별로 이르는 가장 빠른 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뭔가 다른 집단임을 보이는 것은 집단 안의 결속력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집단과의 구별이기 때문이다.
블로와요 교회에서 만난 분들의 복장은 부족구분이 아니라 [교회 구분]이었다. 하나씩 설명해 주었는데 모두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장로교와 감리교 등의 구분을 너머 각 교회의 소속을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왜 여자만 이런 옷을 입었어요?”라고 물었지만, 정확한 답변보다는 ‘남성도 유니폼이 있지만 입어도 되고 안 입어도 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남성에게는 자율적인 선택인데, 여성에게는 의무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하나같이 여성만이 구별짓는 복장을 하고 오셨다. 목사라고 소개하는 남성조차 자신의 교회 복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다른 팀원에게 물어보니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이렇게 입는다고 했다. 목사들은 장로교 목사라도 ‘로만칼라’를 함으로 성직자임을 나타내고 다른 교인들은 자신의 교회 복장을 입는다고 했다. 뭔가가 막~ 떠올라서 질문하고 싶었지만, 논쟁이 될 거 같아 조용히 떠나는 차에 몸을 얹었다.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교복’이 없어지고 자율화가 되어서 억울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고등학교 형, 누나들이 입던 교복을 부러워했던 기억. 그 구별되는 학생집단의 소속이 되고 싶었던 기억이 지금 성황리 방영되는 [드라마 친구]를 계속 보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기억의 실체는 “소속에 대한 갈망과 욕구”였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이 구별과 구분, 차별의 시작임을 동시에 자각하기엔 아직 나의 [평등지수]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