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Methodism)
“감리교도”라는 호칭은 옥스퍼드에 있는 “ 홀리 클럽” 회원을 경멸하는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것이지만, 1729년부터 이 모임의 지도자이던 존 웨슬리(1703-91)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으로의 회심을 결행한(1925) 이후 성서적 거룩함에 대한 방법론적 추구를 의미하게 되었다.
개신교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적 갱신 운동 중의 하나인 감리교는 전 세계 100여개 나라에서 5,500만 신도의 교단으로 성장했다. 각 국가의 교회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교리헌장과 교회 직제에 관한 규정을 갖고 있지만, 세계 감리교는 설립자인 존 웨슬리의 전도 설교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88)의 방대한 찬송가 및 성시 등과 같은 영적인 유산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일치를 나누고 있다.
영국 식민지인 조지아 주에서 존 웨슬리의 선교 활동(1736-37)은 여러 면에서 실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성서 중심적인 그리스도교 교육을 위한 기초적 단위로서, 지명 받은 지도자 아래 오이는 소규모의 반(속회 혹은 구역) 편성에 관한 개념을 설정할 수 있었는데, 이는 감리교의 성장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동역자들이 점차 늘어감에 따라 웨슬리는 여러 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 감리회의 협조를 얻어 순회 목회체제를 구성했다. 이러한 순회 목회는 이에 가담한 조직을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로 결성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회중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분열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고, 장로교의 중앙 집중화 경향 같은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조지아에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두 번째의 회심을 체험하게 된(1738년 5월 24일). 그는 신앙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는 태도를 포기하고, 사랑이 가득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시키는 은혜를 체험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의 도구가 되어, 이후 50여 년 간 감리교의 독보적인 지도자로서 선교와 목회에 거대한 업적을 남겼다.
기존 체제 옹호자의 신랄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가 사회적, 물질적으로 혜택 받지 못하는 계층에게 관심을 집중하게 된 시기는 산업 혁명과 이에 따른 (영국에서) 거대 산업 도시들(지금도 감리교의 주요 중심지이기도 하지만)의 형성 시기와 때를 같이했다. 카를 마르크스가 명성을 얻기 한 세기 전에 웨슬리는 세계 최초로 노동자 계층에게 복음과 아울러 그들의 사회적, 문화적 개선책을 제시했다.
예정설을 신봉하던 성공회 칼빈주의자들에 반하여 웨슬리는 구원을 향한 예수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음을 역설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에 응답하도록 각 개은을 자유롭게 부르신다는 것이다.
“ 믿음으로만”이라는 구절을 폭 좁게 파악하려는 개신교도를 향해,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은 원초적인 회심뿐 아니라 성령과의 계속적인 협력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성령은 인간을 성결하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죄의 욕망과 이기적인 생각을 이겨내는 능력인 사랑을 완성시키는 경지로 인도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강화 받아, 자신을 그 뜻에 복종시키는 행위를 통해 예수의 피만이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 확신에 으르게 된다.(롬 8:14-16, 38-39). 감리교회 속회(10-12명으로 구성)에 가입할 수 있는 요건은, 내면의 경건성을 추구하려는 의욕과 성령의 교통 속에서 기도와 훈련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처럼 그의 가르침을 은총의 교리에 집중시킴으로써,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신조직 정통성을 성령 안에서 활동하는 예수의 사랑으로 불타게 만들었다. 바로 여기에 웨슬리의 영적 유산의 핵심이 놓여 있다.
예배와 사회봉사의 적극적 연결을 주장한 웨슬리 정신을 계승한 감리교회는 그 뿌리를 내리는 곳마다 사회와의 관계 도모에 힘썼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대한 웨슬리의 비전은 현대 감리교 선교사들, 특히 최근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접촉하는 선교사들로 하여금, 신학적 일탈을 피하면서도 해방신학의 정의에 입각한 열망에 합류할 수 있게 해준다.
웨슬리는 결코 그의 갱신 운동을 영국 성공회와 별도로 분리 전개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분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기존 교회에 속하지도 않고 이를 윈치도 않은 많은 사람이 이 갱신 운동에 가담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원활한 목회를 위해 웨슬리는 행정 체제를 개발했는데, 이 체제는 영국 성공회에 종속되기보다는 이와 대등한 위치에서 권한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는 독립 전쟁으로 말미암아 감독제에 의거해 안수 받은 설교자들을 잃었기 때문에, 웨슬리는 목회적 필요성의 차원에서 그의 동료 토마스 코크(1747-1814)를 “미국의 형제들”을 위해 “총무”로 임명했다. 그는 1784년에 코크에게 독립적인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전권을 위임하여 그를 미국으로 보냈는데, 이 독립교회는 감리교 감독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총무”라는 직위는 1787년에 “감독”으로 변경되었다.
영국 성공회에 대한 웨슬리의 충성은 영국내의 감리교도들과의 관계에서 그를 더욱 신중하게 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국 성공회와의 분리를 시도하는 어떠한 공식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식적 선포(1784)를 통해 그의 법적 계승자로 인준한 100명의 설교자들은, 그의 사망 이후 7년이 지나서 교단의 자율적인 치리 구조를 결성하게 되었다. 영국 감리교회는 조직에서 감독 체제를 채택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