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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인권주일 공동설교문

입력 : 2007-12-10 01:43:45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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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인권주일 공동설교문(2007.12.9)

 

그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본문 : 사무엘하 21:1~14)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한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삼년의 기근을 겪게 되었습니다. 삼년의 기근이라면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견딜 수 없는 경제 파탄의 재앙일 것입니다.

옛날 우리네 왕들은 이와 같은 재앙이 올 때는 죄인으로 베옷을 입고 하늘을 향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책임을 갖고 하늘의 뜻을 묻고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다윗왕 역시 삼년의 기근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 직전의 통치자인 사울왕의 기브온 주민 학살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사무엘하 21:1)

기브온 주민 학살에 대해서 성서에는 언급된 곳이 없습니다만 사울왕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수의 이방인인 기브온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것입니다.(사무엘하 21:2) 사울의 빗나간 열심이었고 왜곡된 충성이었습니다. 마치 우리 남북 분단의 역사에서 남을 위하여 북을 죽여 왔고, 북을 위하여 남을 죽여 온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원래 기브온 사람들은 출애굽하여 광야를 거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부터 가나안에 원래 있었던, 아모리인에 속해 있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사무엘하 21:2) 그런데 여호수아서 9장을 보면 하나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이스라엘이 파죽지세로 가나안을 정복하여 들어갈 때 기브온 주민들은 꾀를 내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고 이스라엘로 편입된 것입니다. 더욱이 그 평화조약은 야훼의 이름으로 맺은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로 맹세한 것입니다.“맹세하였거늘”, (사무엘하 21:2). 그러나 사울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다고 그들을 이방인으로 몰아 학살하였던 것입니다.

삼년의 기근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삼년의 기근은 기브온 학살에 부모와 형제, 자식들을 잃어버린 한 맺힌 기브온 사람들의 절규가 하늘에 닿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년의 기근이라는 재앙은 억울하게 죽어간 기브온 주민들의 피를 끓는 소리가 하나님께 들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 양극화라는 재앙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흥청망청 써대고 있지만 다른 대다수 쪽에서는 소외된 분배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재앙과 같은 현실입니다. 지난날의 고도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소외된 노동자, 농민이 노숙자로 버려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왕은 바로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삼년의 기근이 의미하는 바가 단지 나라에 곡식이 바닥났다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들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야훼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사무엘하 21:3)고 묻습니다.

이에 기브온 사람들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니”(사무엘하 21:4)라고 대답합니다. 아마도 처음에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한을 금전으로 보상해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이 자행한 기브온 주민 대량 학살은 금과 은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형제, 남편과 아내, 자식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기브온 사람들의 한은 금과 은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금전 보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일본과의 과거도 예외는 아닙니다. 일제 36년의 한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지난 60년대에 이에 대한 보상을 해주었지만 그 한을 금전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대로 끌려간 할머니들의 한이 물질적 보상으로 풀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억만금을 주어도 풀 수 없는 한입니다. 물질이 한 민족의 위상을 독립적 위치에 올려놓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아직도 재일 동포는 일본 사회에서 억압을 당하고 그 자녀들은 학교에서 이지매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금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6,25 한국전쟁의 비극은 우리의 한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이념이라는 절대 우상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북쪽에서는 반동분자로, 남쪽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대량학살을 당한 4,3 제주 항쟁, 거창 주민 학살사건 등, 그리고 불순분자와 폭동으로 몰린 80년 광주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그 한은 가슴 속에 깊이 깊이 심어져 있습니다. 남북 분단, 그것도 모자라 동서의 지역 차별과 갈등은 이 나라 백성에게 깊은 한을 심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보상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배부름으로 잊혀질 문제가 아닙니다. 이에 기브온 주민들은 다윗에게 사울 가문에 속한 일곱 사람을 내어 달라고 말합니다.(사무엘하 21:5) 이것은 불행한 과거 역사의 청산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의 요구대로 사울 가문 중 일곱 사람을 내어 주고 그들은 나무에 매달려 처형을 당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3년의 기근을 뒤로 하고 추수철이 다가온 것입니다.(사무엘하 21:8~9)

그러나 문제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처형당한 일곱 사람 중 두명의 아들을 둔 한 어머니의 한 맺힌 가슴이 남아 있었습니다. 처형당한 두 아들의 시신을 두고 이 어머니는 몸부림치며 낮에는 공중의 새가 내려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달려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연히 그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겠지요. 사울의 첩 리스바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아버지인 사울이야 못된 짓을 하였지만 두 아들의 죽음을 봐야 되는 어머니야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 처형당해 버려진 자식의 시체를 붙들고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무엘하 21:10)

이것을 알게 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있었던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처형당한 일곱 사람의 뼈를 가져다가 장사를 지내 주었습니다.(사무엘하 21:11~13) 원래 죄인으로 처형당한 시체는 당시 짐승의 먹이로 방치해 두었던 것을 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을 어기고 다윗은 사울의 첩 리스바의 아픔을 위로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장사 후에 비로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삼하21:14)

 

기브온 사람들의 한을 풀어 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그 나라를 돌보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처형당한 두 아들의 어머니 리스바를 위로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브온 대량 학살, 기브온이 지극히 작은, 힘없는 소수의 이방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당한 역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억울한 피의 호소를 땅으로부터 들으셨던 분입니다. 그냥 넘어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작은 생명이라도 그 생명이 당한 억울한 한을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풀고서야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성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거창한 역사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소외 속에서 맺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찌 과거 역사의 피해자들뿐이겠습니까? 신체의 어느 한 곳이 장애라는 이유로 몸 전체를 무력화시키는 우리 자신, 우리 사회에게서 차별을 받고 있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혼혈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어릴 때부터 놀림감이 되어 마음 깊은 곳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남의 나라 사람의 아내가 되기를 바라며 노예처럼 팔려가는 외국인 여인들도 있습니다. 난치병이 마치 무슨 큰 죄인 양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들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라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한, 이들의 아픔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도처에는 아직도 이 세상을 원망하고 세상 사람들을 저주하며, 억울하게 소외당하며 가난과 차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대접하고자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실직으로 늘어난 결식 아동들의 무료 급식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가 보도되었습니다. 반 아이들이 거지 밥이라고 놀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료급식을 타지 못하고 굶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습니다.

요즘 노숙자를 위한 무료급식이 늘고 있습니다. 먹기만을 한다면 하루 11끼까지는 무료로 먹을 수 있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각 기관마다 무료급식에 경쟁이 붙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얻어먹는 사람들은 며칠만 얻어먹으면 자존심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에 대한 존중이 없어지는 것만큼 커다란 인권 박탈은 없습니다. 급식을 늘릴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늘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인권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몸과 마음에 상처 받은 분노와 증오와 한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먹을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은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다움을 회복시켜 주는 것, 일하고 땀 흘리고 그리고 땀의 대가를 받게 하는 인간다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이웃들의 한 맺힌 신음소리를 듣고, 그 아픈 가슴을 쓰다듬을 때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그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