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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칼 백과 '가르치는 권한'

입력 : 2007-11-18 08:07:36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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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권한 Teaching Authority

 에큐메니칼 토론 중 이 주제는 최근까지도 분명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르치는 권한’의 문제는 교회의 분리, 분열, 그리스도교 일치의 결여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 공동체의 신앙 안에서 비롯된 가르치는 권한의 문제는, 예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네 가지의 주요한 가르치는 전통에 대한 다원성으로 특징된다. 그리스도교는 가장 초기부터 결정적인 세 가지 물음과 맞붙어 씨름해야 했다. 즉 ‘무엇이’ 그리스도 사건의 관점에서 유대교 경전인 구약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표준적이고 일치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신앙의 규범, regula fidei)의 내용인가? “누가” 과연 교회라는 거듭난 공동체 안에서 권위 있는 증인이며 교사인가? “어떻게” 공동체와 그 지도자들이 신앙의 내용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삶의 방식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교회의 구성원과 흩어진 공동체들을 하나의 사랑의 끈으로 결합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주변 세계의 도전의 한복판에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헌신의 고백을 하게 할 수 있는가?

신약성서의 저작들은 이러한 본래적 복음의 케리그마,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 공동체에 위임된 주님의 권위, 증인들의 대담함과 증거 등에 대한 근본적인 싸움을 반영한다. 또한 신약성서는 다양한 가운데서도 일치와 통일성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초기의 신앙고백 문구, “열두”사도나 바울 같은 첫 복음 전도자의 권위, 복음서의 이야기와 사도적 전통의 수집, 세례와 성찬의 공통적인 실행, 공통적인 삶의 규범(예를 들어 결혼 문제나 헬라적 상황에서의 공적인 삶에 대한), 파문과 화해의 실행, 중대한 사안에 대한 조정의 모습(행 15장), 후기 발전 단계에서 좀 더 일반적인 유형의 교역과 그것의 질서 정연한 전달.

처음부터 케리그마 담지자의 행동을 형식적으로 정화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와 “담대함”으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 28:18-20; 눅 10:19; 요 1:12, 18:20; 고후 10:8, 13:10; 행 4:29, 31, 9:27, 18:25, 28:31). 즉 서기관과 다리 어떠한 세속적 위임은 없지만(마 7:29), 오히려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행 4:13)으로, “성령 안에서”(행 2장; 고후 12:3-11). “예수의 이름으로”(행 4:10),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서(롬 1:1),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행 1:21~22) 그들은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바울서신과 목회서신, 베드로후서, 유다서의 상당 부분에서 가르치는 권한에 대한 형식적 구조를 찾아볼 수 있다. 사도적 권위와 감독직(고전 1:20-21, 3:15-16), 단번의 전달(paradosis, 유 3), 신앙의 규범 속에 담겨진 진리(딤전 1:15, 2:5-6; 딤후 2:18; 딛 1:13-14; 벧후 2:1-22, 3:17; 유 4, 8).

이것은 오히려 신앙의 규칙, 공통된 공동된 삶의 규범, 권위 있는 가르침과 의사 결정의 일반적인 구조의 초기 발전으로, 처음 4~5세기 동안에 공의회, 총대주교구(patriarchal sees), 특히 로마의 주교와 그 관구,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도성과 공교회성을 보호하는 주교의 권위, 교회의 일치와 거룩함을 통하여 더욱 세세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서방에서 발전한 좀 더 정형화된 교도권(magisterium)의 개념을 보기 위해서는 중세기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중세 이후 교도권은 카리스마적이고 전통적인 것으로부터 법적인 권위로(막스 베버), 본래의 권위(auctoritas)에서 현재의 교권(potestas)으로(이브 콩가), 전승(traditio)으로부터 재량권(discretio)으로(칼 모리슨) 그 자리를 옮기면서 법률적인 부대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가르치는 권한은 수여, 선출, 자격이라는 시민적 개념의 토대 위에 세워지고, 목회 관할 구역의 구분이 되었다. 여기서 교황무오설의 기원뿐 아니라 서구 교회 분열의 배후에 놓인 공의회성과 로마 교황 관할권 사이의 논쟁 문제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도 넓은 관점에서는 교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성직자의 권위”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유럽의 계몽주의와 20세기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황화 및 비문화화는 교회의 권위 있고 믿을 수 있는 가르침에 대한 에큐메니칼 토론의 시급함을 가중시켰다. 오늘날 보편적인 권위 있는 가르침은 과거로부터의 논쟁과 이단의 문제가 극복될 때만 가능성과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74년에 열린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아크라 모임은 다양한 교회들의 현재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과 윤리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결정, 규정, 선포하는 방안에 대하여 에큐메니칼 탐구를 시작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탐구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권위 있는 가르침의 기구와 “실례”의 실제적인 다원성과 해석학적인 발전(참조, 해석학),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가 겪는 가르치는 권한의 위기, 현대 언어 철학의 도전, 해석학적인 통찰, 그리고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으로서 가르침의 내용에 의해서일 뿐 아니라, 다양한 교회에서 그러한 가르침을 수용하도록 이끌어 주는 권위 있는 절차의 부재로 인한 교회 스스로의 분열 등이다. “어떠한 교회도 그 고유의 권위 있는 교리에 의해 증명되고, 그 자신이 고유한 살아 있는 가르치는 의식을 통해 약속된 진리의 충만함이 있기 전에는 만족할 수 없음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 의해 인지되고 인정된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WCC 총회는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권위 있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976년 제네바에서 열린 소 협의회는 이탈리아, 그리스, 네덜란드, 동서독으로부터 나온 보고서를 만들어진 문서(One in Christ, 1976년 12월)를 준비했다. 1977년 오데사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The Ecumanical Review, 31, 1979년에 보고됨): “에큐메니칼 운동에 차여하기 때문에, 교회는 가르치는 방법과 양상을 신중하게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화해적인 삶 안에서의 일치와 친교는 그 가르침의 방식이 공동의사 결정 작업을 점증적으로 가능하게 할 때에만 도달될 수 있다.”

이 보고는 특별히 다양한 전통과 실제적인 상황의 다양함 가운데 나타난 의견의 불일치와 그 수렴, 새로운 신뢰 방식을 추구했다. 또 한 이 보고는 에큐메니칼 운동 내에서 오늘날의 보편적인 가르침의 예들을 제시했다.

1978년 방갈로르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위원회 공식 모임의 관심은 당연히 이러한 연구를 심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갔지만, 결정의 합의와 가르침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방안을 좀 더 깊이 모색하기에 앞서 사도적 신앙의 “내용”에 우선권을 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해서 방갈로르 대회는 1960년대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준비한 “공의회의 해석학적 중요성”, “성서의 권위”등과 같은 에큐메니칼 해석학적 주제를 다음으로 미루었다. 가르치는 권한의 주제 역시 리마 문서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르치는 권한의 중요성은 인지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거듭된 정도가 지나치기도 했다.(리마 1982, 밴쿠버, 1983, 슈타방게르 1985, 부다페스트 1989) 여기서 교회의 일치는 세 가지 주요 요소 또는 조건에 의존해 있다. 사도적 신앙에 대한 공통된 이해, 사도적 신앙에 대한 충분한 상호 이해, “가르침과 의사 결정의 공동 방식에 대한 합의”가 그것이다.

리마 문서<세례, 성찬과 교역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에 대한 반응으로 많은 교회는 의사 결정과 가르치는 권한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를 요구했다. 1989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교도권에 대한 그 같은 연구를 “교회의 에큐메니칼 비전을 위한 공통 전망”이라는 프로그램 안에 포함시키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1993년으로 예정된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 주제는 몇몇 쌍방 대화 속에서 토론되었다. 예를 들면 개혁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고서로 제출한 “교회와 세계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1977), 성공회 -로마 가톨릭 베니스 국제위원회(1976)와 웨스트민스터 보고서에서 다룬 “교회에서의 권위”(1981),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고한 “교회 교역”(1981),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고한 “교회 교역”(1981)에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대화의 대부분에서 교황의 가르치는 권한에 대한 특별한 요구의 주제가 비록 그것이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느 정도는 다루어졌다.

이 보고서 중 두 부분만 인용해 보겠다: “교회가 가르치는 권한을 가졌다는 데 대한 이견은 없다.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진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 보존이 단지 신앙 고백문의 반복 문제만은 아니다.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영감 받은 성서와 그의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고하도록 이끄시며, 따라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 다른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새롭게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인간에게 사라지지 않는 권위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권위 있는 여러 선언과 칼케돈 공의회와 같은 공의회적 선언의 중요성을 내포하는 문제는 아니다. 이런 것의 지속적인 유효성은 교회에서 새로운 방법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살아 있는 목소리는 과거와 동떨어져서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하에 존재한다. 성서와 전통의 오랜 대립은 우리가 공유하는 이해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성서로부터 들려오지만 성서가 거기에서 살아 있는 전통을 증거하는 그 성서는, 살아 있으며 진리의 성령에 의해 지금까지 인도되어 오고 있는 교회의 모든 전통에 대한 규범적이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로마 교회의 권위는 교회 안의 다른 누구만큼이나 교회 안에서 사랑의 성령의 지속적인 현존의 현시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실행에서 그 권위는 현저하게 그렇게 현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지역 교회나 지역 교회 연합이든 간에 ‘교회를 세우되 낙담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선포되었다”(감리교-로마 가톨릭 교회의 호놀룰루 보고서, paras 34-35).

교회는 다양한 수준에서 다양한 도구와 매개물을 통해 가르치는 권한을 실행한다. 신앙의 문제들이 걸림돌이 될 때, 그에 대한 결정은 교회에 의해 세계 공의회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 결정이 권위 있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우리는 또한 연합교회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관장하면서 교회의 이름을 빌려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universal primate)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교회의 양 매개체를 통해 믿음의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실수를 배제하게 된다. 이것은 계시의 내용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진리를 되새기게 하고 강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신앙을 더 알기 쉬게 설명하고, 잘못을 지적하며, 충분히 깨닫지 못한 암시들을 밝히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현재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교회의 가르치는 권한은 특별히 불확실성의 시대에 신앙의 눈으로 인도하기 위한 기능이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은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자의 인격이나 직능에 의존하기보다는 복음에 대한 신시성에 의존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복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선포된다. 복음이 선포되기 때문에 단순히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ARCIC 최종보고서, paras 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