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Poor
1948년 암스테르담 총회 이후 40년 동안 가난한 자에 대한 에큐메니칼 관심은 개괄적인 접근으로부터 교리적 과제 쪽으로 전반적으로 이동하였다.
일치점: “삶의 축복에 대한 불평등한 분배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Westminster Dictionary of the Bible). 이러한 전제를 위해서는 가난한 자에 대한 성서의 자료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모세 율법은 가난한 자에 대한 성서적 개념의 근본 원리로 가능했고, 특별히 땅의 소유권에 대한 동등성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매 50년 마다 오는 희년(Jubilee)은 땅의 소유권과 관련하여 생겨난 부정의의가 올바르게 수정될 수 있다는 주장을 확증하는 적절한 호소인 것처럼 보였다(레25:13-25) 이로부터 이러한 역동성에 의해 덮여진 광범위한 내용이 드러나게 된다: 과부, 고아, 나그네는 소위 가난한 자의 보호 특권을 누렸다(시 9:18). 이런 측면에서 왜 예수가 가난한 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는가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마 11:5; 눅 14:21-23). 초대 교회가 교회 안의 가난한 사람들과 기타 다른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에 대해 그렇게 강한 책임감을 느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성서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돕기를 원한다는 암시가 도처에 나타나 있다.
해방신학의 관점: 1968년 메델린 회의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에큐메니칼 이미지가 변화되었다. 하나님은 물질적 축복의 공평한 분배에 단순한 불만족 이상의 것을 제시하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가난한 자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주된 대리자로 드러난다. 이 회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중요한 역할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든 교회로 하여금 각성하도록 촉구했다. 메델린 문서를 보면, 라틴 아메리카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교회의 불가피한 연대성을 주장하면서 교회에 미래 이미지를 부유한 자에 항거하는 가난한 자의 교회로서 묘사하고 있다. “가난”이라는 말은 이로써 감상적인 냄새를 훨씬 덜 풍기게 된다. “오늘날 ‘가난한자’는 억압받는 자이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주변인이며, 기본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는 무산 계급이고, 자기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는 착취당하고 약탈당한 사회 계층이다”(구스타보 구티에레츠).
가난한 자의 하나님: 메델린 회의 이래로, 라틴 아메리카 신학은 하나님 그 자체의 실체를 가난한 자의 빛 아래에서 평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존 소브리노(J. Sobrino)는 말한다. “오늘날의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고난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신정론 문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대답되어야 할것이다. 이제 신학적 담론은 유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변증법적인 것이다. 존재의 유비라는 의미에서 보면, 신적인 것은 피조된 현실에 대한 그 자신의 유사성이라는 의미로 더 잘 앙려져 있다. 이제 강조점은 비유사성이다: 변증법적 인식은 그들의 비유사성 안에서 사물을 인식한다. 여기서 신학적 의지는 “그것과의 대조로부터, 현실의 부정적 구조로부터 살아 있는 체험으로서의 억압 구조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빅토리아 아라야). 따라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전적으로 다른 실재들 즉 해방, 삶, 정의 등을 지시하는 실재로서 억압과 불의를 통하여 지시하는 실재로서 억압과 불의를 통하여 중재된다. 흑인신학과 다른 소수 민족신학도 이와 똑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가난한 자 하나님: 하나님의 특성에 대한 새로운 교리 쪽으로 논쟁의 방향을 이동해 보자면, 우리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단지 인간의 담론적 변증법의 순수한 측면과 그 반대 측면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선포되는 말씀인 성찬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을 통해 계시됨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언어 체계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인간 존재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배척받은 자, 배척당한 예언자, 난민 어린이, 십자가의 만남은, 모든 창조 세계 속에서 정의를 획득하려는 하나님의 해방 투쟁에 자물쇠를 채우려는 부정성(negativities)을 통해 중재된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사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