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 에큐메니칼 강연은 엄혹했던 70년대와 8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와 기독교방송(CBS) 사장으로 재직하며 군사정권에 맞서서 교회의 올바른 목소리를 대변했던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산 역사이셨던 故김관석 목사의 삶과 당시 역사를 회상함으로써 오늘 우리 운동의 정체성을 바로세우기 위한 자리이다.
특별히 이번 제3회 강연은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국제 연대"라는 주제로 김관석 목사가 어떤 상황 속에서 민중현실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계교회 속에 어떻게 당시 상황을 알려 나갔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발제를 맡은 오재식 박사(前월드비젼 회장)는 "그가 가르친 고집스런 겸손을 생각하면 그는 자신을 추모하는 일 자체를 싫어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남은 우리를 위해서 그의 품성과 지도력을 만져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운을 떼며 당시 역사를 되짚어 갔다.
오박사는 김관석 목사가 1970년대부터 전개되는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와 국제연대를 끌어낼 수 있었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기반은 현장의 경험이었다. 60년대 초반부터 도시산업선교가 시작되었고, 60년대 후반부터는 거꾸로 된 십자가를 상징으로 내걸고 삶의 현장으로 내려간 한국사회개발단(학사단, KSCF전신) 운동이 시작된다.
- 처음부터 미국 교회의 영향과 지원,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의 도시산업선교(UIM)와 국제연대 속에서 시작된 이들 운동은 전태일 사건이라는 극적인 현장을 만나며 보다 증폭되고 분명한 입장과 방향을 취하게 된다.
- 그러나 이런 바닥의 움직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72년 계엄령이 내려지고 긴급조치의 행보가 시작된다.
- 군사정부의 철통같은 강경태세에도 불구하고 학생, 청년, 노동자, 농민 그리고 도시빈민들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난다.
- 김관석 목사가 이들 운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73년 봄의 남산부활절 사건이었다. 동지였던 박형규 목사와 젊은이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을 때 당대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교계지도자들은 모두 이들을 외면해 버린다.
-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NCC 총무였던 김관석 목사는 계엄 상황임에서 인권위원회를 설립하여 인권적 차원으로 이들 문제를 해석하며 교회들의 동참을 끌어낸다.
- 적극적인 국제연대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배치'에 있었다. 70년대 초 세계교회협의회에는 박상증, 세계기독학생회에는 강문규, 아시아기독교협의회에는 오재식이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인자들이 해외 각지의 에큐메니칼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 김관석 목사는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전략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며, 세계교회와의 깊은 연대를 끌어내며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을 지탱해 갔다.
이날 강연에는 김옥실 사모님과 그 가족을 비롯해서 박형규 목사, 박경서 박사, 김용복 목사, 김재열 신부, 권호경 목사, 안재웅 박사, 손학규 경기지사, 신선 사무총장 등 당시 국내외에서 활동했던 동지와 후배 여럿이 참석하여 고인을 회상했다.
다음은 운산 김관석 목사의 묘소 "비문"의 전문이다.
묘소 비문 전문
구름에 가린 산을 雲山이라 하던가,
숱한 인물을 복 돋우어 길렀지만
정의를 위해 고통 받는 민중을 끌어안았지만
겨레의 대의를 일으켜 세웠지만
교회가 일치해야 할 가치를 찾아 온 몸으로 섬겼지만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세계 속에 당당히 서게 되었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나니
너무 아깝고
참으로 따를만해
후학들이 그를 이렇게 기린다.
2004년 2월 4일 제2주기 추도일을 맞이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