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CC

2003 WCC 중앙위 총무보고

입력 : 2003-09-08 08:57:21 수정 :

인쇄

 

 

WCC 중앙위원회

2003.8.26-2003.9.3, 제네바

 

1.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번 중앙위원회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회의에서 우리는 새로운 총무를 선출해야 하고, 2006년 포르트 알레그레에서 열릴 제 9차 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첫 단계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제를 결정하는 일이라든지, 의석 배분 문제 등과 같은 총회의 기본적인 내용들이 이번 회의의 의제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 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일들이 우리의 진정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의제를 통해 이미 보신 것과 같이, 이번 회의의 중심적인 주제는 '생명을 위한 돌봄'(Caring for life)이다. 이것은 하라레 총회 이후의 WCC 활동을 위해 채택된 중요한 주제들1) 중 하나이다. 다른 세가지의 주제들은 이전의 회의를 통해 이미 다룬바 있어, 이번 2003년 중앙위원회의 전체회의와 성서연구 시간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기로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보고서를 '생명을 위한 돌봄'이라는 주제가, 역사 속의 현 시점에서 WCC의 삶과 활동을 위해 갖는 중요성에 대한 성찰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리고 지난번 중앙위원회 이후 WCC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진전을 간단하게 돌아본 뒤, 마지막 부분에서는 '21세기를 향한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에 대해 지난해 내가 최초로 내놓은 성찰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 논의들을다루고자 한다. 실무진들의 열성적인 지원 덕분에, 나는 몇단계 더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생명을 위한 돌봄

 

2.  생명을 위한 돌봄은 기독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눔과 봉사활동에 있어서 언제나 중심적인 동기로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최근 회원교회들을 방문하는 동안 있었던 몇가지 사례들을 여러분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올해 3월 나는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 그중에서도 특히 라오스와 태국, 미얀마, 그리고 파키스탄의 교회들을 방문했다. 앞의 세 나라는생명을 위한 돌봄이라는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대 불교의 영향이 아주 강하게 남아 있는 나라들이다. 라오스의 경우, 아직은 작은 라오스 복음주의 교회가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오랜 박해와 의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라오스 복음주의교회는 인민들의 공동의 선을위해 헌신함으로써 존경과 인정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불교 수도원에 의해 건립된 병원을 위해 배당된 10개의 병상을 불교 공동체의 불교종단 최고 기관에 기증하는 행사에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태국에서는 교회가 백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국가의 교육 및 의료 시설을 제공하는 중심 주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치앙마이에 있는 맼킨 재활센터를 방문했다. 이곳은 1908년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센터로 설립됐으며, 지금은 다양한 종류의 손상과 상처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전문 재활치료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센터가 하고 있는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한 풍부하고도 감동적인 접근은 나라 전체에 귀감이 되고 있었다.

 

3.  미얀마 랭군에 있는 맹인학교와 농아학교를 방문했을 때, 나는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두 학교는 미얀마에서도 유일한 학교들이었으며, 삶을 일궈 나가기 위한 기본적인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젊은이들이 지방의 먼 곳에서도 이들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특히 이 학생들은 미얀마 상황에 적합한 점자와 수화를 개발하는 일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두 학교에서 발견한 교사들의 헌신적일 돌봄과 삶을 긍정하는 정신은, 불교 사회에서도 기독교적인 증언의 한 형태라는 인정을 받고 있었다. 아주 최근인 7월에 벨라루스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좀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곳 정교회는 지난해 에큐메니칼 운동 동반자들의 도움으로 민스크 교외에 '자선(자비)의 집'을 열었다. 여기서 하고 있는 활동들 중에는 체르노빌 사건 당시 방사능에 노출된 어린이들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 있었다. 또, 앉기만 하면 몸 안에 있는 방사능을 측정해 치료 방법을 경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창의적인 의자를 개발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또다른 프로그램은 휠체어에 의존해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 삶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다른 재활 프로그램으로는,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AIDS/HIV 양성반응 환자들을 위해 아프리카의 교회들과 지역 기독교 공동체들이 펼치고 있는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내 기억으로는 나미비비아와 보츠와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프로그램이 특히 좋아 보였다. 여러분들도 누구나, '생명을 위한 돌봄'이 오늘날 교회의 선교 중에서 중심적인 과제가 되는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4.  이번 회의에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인 시각에서 '생명을 위한 돌봄'이라는 주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예를 들자면, 생명공학의 문제에 대한 관심,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또 다른 두 개의 전체회의, 즉 청년에 대한 전체회의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전체회의 역시 이 주제에 대한 우리들의 성찰을 도와 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명을 위한 돌봄'이라는 주제에 접근할 경우, 우리는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의 영적 윤리적 문제와 만나게 되며, 이는 이미 지난 1999년의 중앙위원회에서 가려 낸 바 있다. 나아가 이같은 접근방법은 WCC의 새로운 정신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배움의 영역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근본적인 영적 도덕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용기를 교회들이 발견한다는 기대는, 오늘날 곳곳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커져만 가고 있다. 이는 올해 1월 포르트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WCC가 사실상의 차별성을 갖고 있고 또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시대의 정치적 투쟁을 넘어서는 경지로 우리를 이끌어 갈 대화의 문화와 영적 분별력을 지닌 윤리를 강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5.  '생명을 위한 돌봄'에 대한 논의를 열어 가지 위해 선택된 두 개의 구체적 사례들은 모두 인간의 생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유전자를 둘러싼 기술과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제기되는 도전들은 모두 인간의 생명 문제에만 국한돼 있지는 않다. 사실, 기술적인 목적으로 생명의 형태를 이용하는 것과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생명의 과정을 독점하는 일은, 동물과 식물의 생명과 관련해서는 이미 그 실행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생명이 단순히 다윈의 자연도태 원리의 산물이라고 여겨지는 경우, 그리고 생존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는 오로지 적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이같은 이해가 대중화돼 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생명의 신성함과 불가침성을 주장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확신이 인간의 생명을 더 이상 보호해 주기 힘들다.

 

6.  분만전 진단,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복제, 줄기세포 연구 등과 같은 인간 유전자 기술 영역의 발전, 그리고 인간 공동체 내에서 자리를 얻어 내기 위한 장애인들의 도덕적 영적 투쟁은 에큐메니칼운동을 함께 하고 있는 기구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과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를 재고해야 한다는 도전을 던져 주고 있다. 여기에는 생명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이해와 관련된 두가지의 구체적인 질문이 내포돼 있다. 첫째, 인간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둘째는, 창조된 모든 생명의 형태가 지닌 '선함'에 관한 성서의 확언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미 위원 여러분들에게 발송해 드린 바 있는 에큐메니칼 장애인운동 네트웍(EDAN)2)에서 준비한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라는 제목의 잠정문서(interim statement),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해 장애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신선하고도 통찰력 있는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문서에 담겨 있는 신학적인 성찰은 생명공학의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는 윤리적인 도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 역시 담고 있다.

 

7.  앞의 두가지 논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들에 관한 장애인들의 시각으로부터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들을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이 해석들은 각 사람들이 지닌 본래적인 존엄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고, 따라서 사회 속에서 한 인간이 가지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잠정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같은 경향은 백인, 남성, 비장애인, 지식인 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증진시키는 일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경향은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으므로 우리모두는 완벽해야 한다는 편견을 더욱 공고히 해 주기도 했다. 그같은 관념적인 완전함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할 경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분명히 육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를 안고 잇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근대주의자들의 접근방법은 과거 전통사회가 지녔던 태도에 도전을 던졌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근대의 개인주의가 지난 성공 지향적인 가치들은,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기독교 신학이 지닌 핵심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는 '이마고 데이'에 대한 해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para 25)3)

 

8.  인권 문제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재공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들이  대부분 '이마고 데이'에 대한 이같은 해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장애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성찰로부터 제기되는 도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들의 문서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성서의 전통은 개인에 대한 근대의 관념을 알지 못한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아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창조 이야기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됐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첫 번째 인간의 불순종, 즉 '타락' 아래 있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다. 성서 첫 부분에 들어 있는 신화론적인 언어들은 인간과 창조주 사이의 관계 속에 들어 있는 기본적인 단절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인 인간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느냐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생명을 주는 관계가 회복된 뒤에 가서야 그 최종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의 유형론적 비교를 통해 던져 주려는 메시지(로마서 5:12 이하)도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 생명의 온전한 의미와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이다.

 

9.  이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인간 생명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지향점은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자신 안에서 드러내신 유일한 인간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는 것은 완벽하면서도 성공을 이룩한 힘있는 개인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받기 쉽고, 약하기 이를데 없으며, 파괴돼 버리기 까지 한 인간 삶의 모습, 긍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사랑과 상호성을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진리라고 긍정하는 그런 모습을 그리스도에게서 본다. 인간의 삶이 지닌 상처받기 쉬운 모습은 인간의 삶 자체가 상호 신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침해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그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모든 창조된 생명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잇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인간이 그 형상을 품고 있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교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때, 이것은 더욱 강화된다. 하나님의 본성,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이다. 그런 관계적 특성 안에 있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이며, 이는 창조된 생명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신성함을 구축해 주는 인간의 은사적 특성이 생명의 시작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명을 주시는 이'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 은사적 특성은 매일매일 새롭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10.  이처럼 인간 생명이 지닌 신성함을 그 관계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생명공학 분야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같은 이해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임의로 조정당하지 않으며,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순전히 경제적인 이해에 종속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귀착시키는 경제학적 가치체제의 영향 아래 있다. 많은 나라들과 교회들 내부에서 배아의 사용에 내포돼 있는 윤리적인 문제들이 논의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배아의 사용 자체가, 배아 줄기세포를 얻기 위해 시험관 등 생체 외부 수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인간 생명이, 새로운 형태의 치유를 통해 다른 인간의 생명을 방어한다는 가치와는 반대 쪽으로 기울어진 가치, 즉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된다. 또하나의 예는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유전자 정보에 대해 특허권을 부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제 2 정책위원회(Policy Reference Committee II)를 위해 '생명을 위한 돌봄-인간의 유전자'라는 제목의 문서가 준비돼 있다. 이 문서는 범주적으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생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인간 생명에 특허권을 부여하는 것은 이 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11.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되는 두 번째 문제는, 창조된 모든 형태의 생명이 지닌 '선함'을 성서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관한 것이다. 땅 위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는 이원론적이고 묵시문학적인 경향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눈에는 인간 생명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아주 좋은 것'이라는 확언을 기독교 신앙이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같은 신앙적 증언이, 생명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완벽함에 대한 규범으로 돌아설 경우, 하나님의 뜻을 생명을 억누르는 인간의 힘의 원천으로 악용하게 된다. 인간의 생명들이 미학적, 도덕적, 혹은 물리적 완벽함의 정도를 따라 판단을 받는 것이다. 장애나 혹은 다른 어떤 약점으로 인해 완전한 인간 생명이라는 사회적인 규범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존재로 여겨진다. 장애를 지닌 어린이를 양육하려 하는 부모들을 도덕적인 압박감이 짓누르게 된다. 태아에 대한 유전자적 진단 등 새로운 선택의 기술들이 새로운 형태의 우생학으로 나가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다른 사람에 의해 장애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을 돌보고 긍정하는 새로운 문화가 우리에게 급박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12.  그러므로, 모든 인간 생명이 지닌 가치와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생명의 선함'에대한 긍정은, 깊은 영적 고통의 근원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전통적으로 장애는, 부족함, 약함, 따라서 완전한 인간보다는 낮은 어떤 것 등으로 인식돼 왔다. 장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장애를 어떻게 다뤄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신학적 사회적 해석들이 제시되곤 했다. 그러나 이 해석들은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장애가 오는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해 전혀 응답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잠정문서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성찰을 제공해 준다. "장애는 인간의 상황이며, 그 자체로도 불명확하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선함과 인간의 삶에서 야기되는 파괴 두가지 모두로 표현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장애를 갖고 잇는 인간 생명이 지닌 두가지 측면을 모두 경험한다. 이 두가지 측면 중 어느 한가지만으로 장애를 설명한다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을 부정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장애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내용에 인공적인 존재론적 분열을 야기하는 것이다."(para 20)

 

13.  따라서, '생명의 선함'은 생명이 존재하는 모습과 앞으로 돼야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잠재적인 은사와 제한을 함께 갖고 있다. 피조물은 선한 것이지만 유한한 것이며, 선한 생명은 그 유한함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죽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해서는 한계이거나 손상인 것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은사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관계를 통해서,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창조됐고, 서로의 은사를 더욱 강하고 크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잠재력이 실현되고 이를 통해 생명이 지닌 선함이 드러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대로 인간 생명의 선함이 충분하지 않다는 악압적 사고에서 해방될 때,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들의 부족함 조차도 공동체에 대한 잠재적 은사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한계와 유한함을 인식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산산조각 나고 완전히 뒤집혀 버렸을 때 느끼는 감정을 알기 때문이다.

 

14.  기독교 신앙의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진정 가장 중요한 증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파괴돼 있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상황을, 그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인간들과 공유하신다는 사실을 이 증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그의 육체의 깨어짐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상징이 됐다. 그가 오셔야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며, 그것도 풍성하게 얻게 된다.(요한복음 10:10) 그러나 이 생명은 하나님의 은사로 남아 있을 뿐, 우리가 소요하지는 못한다. 바울이 '질그릇 안에'(고린도후서 4:7)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계속적인 생명의 숨결에 의존해서 이 은사를 받아 담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증언은, "세상적인 형상(하나님의 형상이 아닌)이 우선되는 우리의 문화, 관념적인 완전함이 가치를 부여받고 약함은 비난받는 우리의 문화, 그리고 성공만이 강조되고 실패는 감춰지는 우리의 문화에 대한 도전을 우리들에게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증언은 우리의 생명 안에서 십자가가 중심이 되고 가시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para 63)  목요일 오전4)에 '생명을 위한 돌봄'이라는 주제에 대한 강연이 포함된 두 개의 전체회의가 예정돼 있음을 여러분께 알리는 바이다. 이 전체회의들은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와 깊은 성찰을 위한 충분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지난번 회의 이후 WCC에서 이루어진 진전

 

15.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실행위원회와 임원, 그리고 실무자들이 지난해 우리가 직면했던 중요한 도전들에 대응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적인 내용들은 이번 회의를 준비할 수 잇도록 여러분들에게 이미 발송된 '임원회 보고'(문서번호 GEN 1)에 요약돼 있다. 이 보고서의 상당부분은 재전문제와 국제적 조작 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WCC가 처해 있는 매우 심각한 재정형편은 올해 우리가 많이 신경을 썼던 부분인 것도 사실이다. 예산과 프로그램, 그리고 실무자 등을 필요한 만큼 삭감한 결과, 우리는 다시 한 번 WCC의 내부 조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  분명한 사실은, 이처럼 불확실한 상황과, 값진 동료와 중요한 사업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이 실무자들의 정신과 동기부여에 아주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약 6개월 이상 동안 새로운 패턴을 따라 일해 오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이루어지고 일의 리듬도 되찾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해 중앙위원회에서 세운 예산 골격의 연장선상에서 WCC의 재정을 운영하려는 노력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났으며, 앞날에 대한 예상도 신중하기는 하지만 희망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균형예산의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부금 수입의 감소현상 역시 개선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번 총회 까지의 기간이 결정적인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이며, 실행위원회에서는 여러분들의 생각을 모으기 위한 여러 가지의 중요한 제안들을 준비했다. 임기가 끝나 가고 있는 상황에서, 감사를 표현해야 할 사람이 많다. 지난해 지명된 소슈모 특별위원회 위원들과, 재정위원회 임원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재정담당 부서 실무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심각한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엄청난 공헌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7.  지난번 회의와 그 이후의 기간 동안 활발하면서도 격렬한 논란을 일으켰던 또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바로 정교회의 WCC 참여에 관한 특별위원회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중앙위원회 회의 기간동안, 이 특별위원회의 활동을 계속 이어갈 위원회의 명칭과 수임사항과 관련해서 가장 강력한 으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후 (적어도 몇몇의)회원 교단 안에서 계속된 논의들은 '공동의 기도'와 관련된 제안들과 '교회론'에 대한 성찰에 우선적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마르곳 캐쓰만박사가 중앙위원직을 사퇴한 것이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특별위원회의 보고서가 중앙위원회가 열리던 기간에 먼저 웹사이트에 올라오고 이후에 '에큐메니칼 리뷰' 2003년 1월호를 통해 인쇄물로 배포됐다는 사실이 문제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18.  그동안, 정교회 자체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수 있도록 특별위원회의 보고서를 희랍어와 러시아어, 그리고 아랍어로 번역했다. 특별위원회의 집행위원회는 6월초, 데살로니카의 아리스토텔레스 대학 신학부가 주최하는 심포지움에 시기를 맞춰 데살로니카의 네아폴리스에서 그 첫 모임을 가졌다. 여러분들은 이미 이번 회의 준비문서들에 포함된 이 회의의 보고서를 받았을 것이다.(문서번호 GEN 4) 이 보고서는 지난해 이후의 논의를 통해 이루어진 진전이 갖는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다. 집행위원회는 특별위원회의 정신을 새롭게 강화할 수 있었으며, 일부 비판적인 견해들에 대응한다는 차원에서, 특별위원회 보고서가 갖고 있는 비전을 납득시키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 비전을 다시한번 강하게 재천명했다. 이와 함께 여러분들은 합의의 과정을 향한 움직임에 대한 중간보고서(문서번호 GEN 4.1)를 받았을 것이며, 지난해의 중앙위원회에서 원칙적으로 동의를 얻은 헌장 및 세칙 개정안 묶음(문서번호 GEN 4.2)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위원회의 제안을 실행에 기고 중앙위원회의 결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2006년 총회까지 향후 2년 동안 우리가 계속 주의깊게 논의를 더 해 나가야 할 것이다.

 

19.  나는 올해 3월에 그리이스 교회를, 그리고 7월에는 러시아정교회를 각각 방문, 특별위원회의 활동을 개인적으로 지원했다. 그리이스 방문 기간 동안에는 크리스토둘로스 대주교, 그리고 교회간 관계를 위한 교구청위원회 등과 만날 기회를 가졌다. 두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던 아테네 대학교 신학부의 교수들과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이스 교회가 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제안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WCC의 삶에 대한 참여를 강화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확실한 인상을 받았다. 이는 그리이스 교회 교구청이 오는 2005년 그리이스에서 열릴 예정인 다음번 세계선교협의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WCC를 초청한 일에서도 다시한번 분명해진다. 최근 러시아정교회를 방문했을 때에는, 키에프와 민스크를 짧게 둘러 보았다. 모스크바에서는 키릴 총대주교를 비롯해, 대외관계부의 고위 실무자들과 만날 수 있었으며, 대외관계부가 주최한 라운드 테이블 토론회에 참석해 지식인, 정치가, 언론인 등을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 정교회가 이미 지난해 표명한 바 있는 특별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다시한번 확인됐으며, WCC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이미 형성돼 가고 있다는 분명한 인상을 받았다.

 

20.  마지막으로, 이라크와의 전쟁을 주도한 미국 행정부와 그 동맹국들의 정책에 대한 교회들의 공통된 응답을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강력한 에큐메니칼 행동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국제 문제(Public issues) 관련 문서들(문서번호 PUB 2, 3)에 담겨 있다. 올해 3월 아시아를 순방하면서,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이 두 이슬람 국가에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기독교 교회들이 한목소리로 전쟁 정책을 반대한 것이, 이것을 사무엘 헌팅턴이 주장한 바 '문명의 충돌' 이론에과 그 이론이 국제관게에 미친 위험한 영향에 대한 확신에 찬 논박이라고 생각하는 무슬림 사람들을 위한 커다란 도움으로 크게 환영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

 

21.  지난해, 나는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이 직면한 도전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나의 보고서를 마무리한 바 있다. 이 분석을 나로 하여금, '21세기를 향한 에큐메니칼운동의 새로운 모양새'에 대한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중앙위원회는 제 1 정책위원회(Policy Reference Committee I)의 제안을 기초로, 이같은 성찰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 제안이 담고 있는, 지난 40년 동안 이어져 온 에큐메니칼 조직의 유형들을 에큐메니칼 파트너 기구들과 함께 재검토하는 과정에 대한 파트너 기구들의 의견을 살펴 보기 위해 일련의 협의회들이 이 제안의 후속조치로 이루어졌다. 이번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분께 배포된 문서들 중에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한 문서를 보았을 것이다.(cf. 문서번호 GEN 10.1)

 

22.  비록 급박함에 대한 생각을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구적 모양새를 재검토하는 일은 필요하면서도 중요하다는 것이 WCC의 에큐메니칼 파트너 기구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실무자 집행그룹이 사퇴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이어진 전체 실무자들과의 만남의 주간 동안 강력한 내부적 재평가의 과정이 있었으며, 이과정에서 서로 다른 동반자 네트워크들, 예컨대 지역 에큐매니칼 조직들, 국가 교회협의회들, 세계적 규모의 기독교 공동체들, 전문 사역 가구들, 국제 에큐메니칼 기구들 등에서 일하는 경험 많은 에큐메니칼 공동활동가들로 구성된 소그룹과 WCC의 의사결정기구에 있는 인물들이 만나는 회의를 WCC가 개최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중요한 도전들을 분석하는 일, 변화를 위한 선택 사항들을 검토하는 일, 그리고 각 기구들에 제시될 분명힌 제안을 마련하기 위한 협의와 연구 과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비망록을 작성하는 일 등이 이 회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구대표자네트웍(HOAN)은 2003년 4월 WCC 임원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처음으로 이같은 회의를 제안해 왔다. 임원들은 5월에 있었던 회의에서 이 제안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의장 아람 1세는 올해 11월 레바논의 안텔리아스에서 열릴 회의의 초청장을 보내게 된 것이다.

 

23.  WCC가 이 일을 주도하는 것은 기구적인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에큐메니칼운동이 지닌 일관성'을 유지하고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헌장상의 의무(WCC 헌장 제3장) 때문이다. 이제까지 이어진 대화 과정에서 모든 동반자 기구들이 이 성찰의 과정을 주관하는 WCC의 역할을 확인했다. 논의 과정에서는 또, UN 역시 이제까지 이어 온 기구적 유형의 지속 가능성과 관련된 비슷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지구화 과정의 빠른 확산과 그것이 국제적 체제의 기능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변화의 필요성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정부들과 정부간 기구들은 자신들의 활동 방식을 조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새로운 형태의 '지구적 지배'를 강하게 추구하는 세력도 있다. UN이라는 시스템이 직면한 구체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에큐메니칼운동에서 경험하는 문제들과 아주 유사하다. 예를 든다면, 기금의 감소, 양자간의 대화와 계약을 중시하는 풍토의 증가, 늘어나는 UN 기구들과 NGO 공동체 사이의 경쟁관계, 새로운 국제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것에 관한 시민사회기구의 영향력에 대해 정부들이 보여 주는 방어적인 태도 등이 그것이다. '보다 느슨하고, 보다 가벼우며, 보다 유연한 구조'를 채택함으로써 '타당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희망 아래 실용적 차원의 기구 및 구조 변화를 통해서 이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세계사회포럼은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세계화의 과정을 위한 동력을 제공해 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분명한 비전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24.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의 목적은 분명, 세계적 차원의 기독교 공동체를 21세기의 세계 속에서 공동의 증언과 봉사를 해 나갈 수 있도록 움직이는 에큐메니칼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에큐메니칼운동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제기되는 공동의 소명에 대해 응답한다. 이 소명에 응답한다는 것은 여러 다른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목적들에 대한 어떤 선언도, 더욱 철저히 검증되고 연구될 필요가 있는 여러 개의 가설들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에큐메니즘의 규범적인 정의를 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에큐메니칼운동의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에큐메니칼 논의 과정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공식들을 점검하는 CUV문서의 제 2장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려 한다. CUV는 WCC의 자기이해(제 3장)에 대해 말하기 직전에, 아주 세심하게 에큐메니칼운동의 목적을 설명한다. 이 문서는 요한복음 17:21절("그들로 하나되어. 세상이 믿게 하려는")과 에베소서 1:10절("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에서 표현되고 있는 에큐메니칼 비전이 서로 연관돼 있음을 분명히한다. 그러면서도 이 문서는 동시에 "에큐메니즘의 사회적 차원이 더 우선임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영적 혹은 교회론적 에큐메니즘이 더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계속적인 갈등과 때때로 드러나는 적대감"(cf. para 2.5)5)을 인정한다. 이같은 배경을 극복하기 위해 CUV 문서는, "몇가지의 분명한 구분점들과 같음이 드러나는 모습들"을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동의 기반이자 출발점으로 제안한다.(cf. para 2.8) 지금 계획되고 있는 협의의 과정은 이같은 생각의 타당성을 검증해야만 할 것이다.

 

25.  따라서, 새틀짜기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하나의 에큐메니칼운동의 목적과 지향점에 대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에큐메니칼운동이 하나의 비전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세계화된 이 세상에 만연돼 있는 가치들과 긴장관계에 돌입할 수 있는 가치들에 헌신한다는 사실을 논의의 시작단계에서부터 분명히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 담어 둔 새틀짜기의 목표는, 이 하나의 비전을 지탱하고 강화하는 것이어야 하는 동시에, 에큐메니칼운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여러 가치들이 보다 큰 일관성을 확보하게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협력관계를 촉진하고 그것을 보다 효율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기 위한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구조적 재조정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서로 다른 동반자 기구들에게 있어서는, 기금확보 문제에 대한 고려 역시 앞에서 말한 것들 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가치를 따라 움직이는 에큐메니칼운동이라는 특성을 형성해 나가자는 보다 큰 목표 안에 들어 있는 한가지 요소일 뿐이다. 이 목표는 동반자 기구들을 다시 한번 공동의 가치 및 행동 체계 주위로 집결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공동 사역에 대한 감각을 형성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목적은 필요한 기구 및 구조의 변화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26.  CUV 문서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해 WCC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에큐메니칼 비전을 형성하고 보다 넓은 에큐메니칼운동에 있어 자신의 역할과 자리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CUV 문서는 WCC가 갖고 있는 제도적인 시각이 변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CUV 문서는 에큐메니칼운동의 특징이 다원중심적(polycentric)인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WCC에 대해서는 신앙과 삶, 증언과 봉사에 있어서 코이노니아를 향해 가고 있는 '교회들의 친교'(Fellowship of churches)라는 이해를 제안한다. 이것은 구조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WCC는 하나의 기구로서, 중앙에서 통제하는 위치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에큐메니칼운동의 일관성을 증진하는 역할을 자임한다. 최근에 와서 정교회의 WCC 참여에 관한 특별위원회는 에큐메니칼 공간에서 교회들을 하나로 결합시킬 협의체'라는 비전을 내놓았는데, 이 협의체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신뢰가 구축될 수 있는 곳

* 교회들이 서로 대면하면서 그리고 서로의 만남을 삼화시키면서, 세계를 읽는 자신들의 눈, 자신들의 사회적인 실천, 그리고 자신들의 예배적 교리적 전통을 검증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곳

* 교회들이 자유롭게 지원과 디아코니아에 입각한 봉사를 위한 네트워크를 창출하고, 자신들의 물적 자원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곳

* 교회들이 신앙, 성례전적인 삶, 증언 등에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 서로를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의 세례를 송축하며 성만찬을 집행하는 교회로 인정하는 것을 막는 장벽을 대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허물어 나가는 곳(para 11)6)

 

27.  특별위원회가 사용한 '에큐메니칼 공간'이라는 개념은, 에큐메니칼운동의 새 틀을 짜는 일과 그 과정에서 WCC가 그 과정에서 하고자 하는 역할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갈수록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교회론과 윤리'에 대한 연구 과정은 WCC를 '평화를 만드는 존재'라고 지칭하고 있다. 방법론적인 면에서 볼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WCC 의 역할은 영감을 부여하고 과정을 촉진시키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바는 방법론 그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근본적인 가치의 선택을 은근히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양자간의 대화를 통한 방법보다는 다자간의 대화를 통한 방법을, 에큐메니즘의 고백적인 모델 보다는 협의체적 모델을, 기구적인 회원권 보다는 개방된 참여를, 조직체로서의 교회들의 에큐메니즘을 향한 집중보다는 에큐메니즘의 폭넓은 의미를 각각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 개념은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에큐메니칼운동이 지역의 차원과 세계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모습을 모두 하나의 '공간'에 집결시킨다는 것이다.

 

28.  이제 진행해 나가려고 하는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파트너들이란, 그들이 WCC와 맺고 있는 관계와는 상관 없이 WCC의 헌장 중 기초7)에 표현돼 있는 신앙에 대한 기본적 확언을 인정하는 파트너들, 그리고 교회가 그 구조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칼운동의 주연 배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파트너들 모두라고 할 수 있다. 이 파트너들은 또, 교회의 일치, 모든 세계에서의 복음의 선교적 선포, 정의와 평화를 위한 나눔과 봉사에 대한 능동적인 헌신 등은 모두 에큐메니칼 비전의 표현으로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 크리스찬 포럼'에 관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논의는 이같은 이해에 기초하고 있으며,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에 대한 대화를 열어 주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이 대화 과정에 참여하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변화를 향한 열린 마음과,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기구적인 욕심들이 이런 만남들을 통해 극복될 수 있게 하는 준비된 자세인 것이다.

 

29.  이 대화의 파트너들은 분명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심에는 교회들이 있다. 그들은 이미 다양한 협력과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 세계적 차원의 기독교 공동체들, 지역별 에큐메니칼 기구들, 국가별 교회협의회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선교협의회(CWM), 선교하는 교회 공동체(CEVAA), 도시산업선교 같은 선교 공동체나 로이엔베르그 교회 펠로우십과 프로부 공동체 같은 교회 공동체 역시 그런 네트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현존하는 네크웍들의 특징은, 서로 멤버쉽이 겹치고 때로는 교회에 대해 경쟁적인 위치에 서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선교, 나눔, 봉사 등의 활동을 펼치는 교회 관련 기구와 단체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들 중의 상당수는 독립적인 NGO의 형태로 조직돼 있고, 따라서 교회구조에 기구적으로 편입되거나 관련을 맺지 않고 있다. 에큐메니칼 행동의 상당부분은 이같은 기구들이 제공하는 기금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세 번째로는 특정한 사안들에 대한 헌신을 둘러싸고 보다 광범위한 에큐메니칼 헌신을 반영하는 국제 에큐메니칼 기구들과, 기독교인, 기독교 운동, 그룹, 네트웍 등의 자발적인 연합체들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아마도 YMCA와 YWCA의 세계연맹, 그리고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밖의 대부분은 아주 최근에 생겨난 것들이다.

 

30.  이처럼 단순하게 파트너들을 살펴 본 바만으로도 면명하게 드러나듯, 에큐메니칼운동은 교회들간의 관계라는 조직체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에큐메니칼운동의 미래가 교회들의 손에만 남겨져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WCC라는 기구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새틀짜기의 목표가 에큐메니칼운동을 하나의 중심으로 모으는 데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을 WCC의 통제 아래 놓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WCC는 우선적으로, 신앙과 삶, 증언, 봉사에 있어서 환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방향으로 교회들의 관계를 심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들의 친교'로 남아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WCC의 회원으로 있다는 것은 상호 책임성을 실천해 나가는 데 있어 서로에게 분명하게 한신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WCC는 에큐메니칼운동의 목표들이 제도적인 교회를 넘어서 보다 폭넓은 영역의 파트너들 사이의 협력을 통해 추구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제공해야 한다. 이를 추구해 나가는 원리는 회원권이 아니라 참여이다.

 

31.  파트너 기구들은, 일치, 선교, 나눔/봉사 등 적어도 세 가지의 영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세 영역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기반을 갖고 있으며, 또 나름대로의 방법론을 발전시켜 왔다. 이 기구들이 WCC의 제도적인 통제, 다시 말해서 교회의 대표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위원회들에 의해 운영되거나 조정돼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WCC의 통합성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폭넓은 참여를 촉진하고 파트너 기구들의 독특한 특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운영의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러 다른 차원의 공교회적 협의기구들은 에큐메니즘이 지역의 차원과 세계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모습 사이의 연관성을 보장해야만 한다. 에큐메니칼 공간은, 세계화라는 도전에 대한 교회의 가장 강력한 대응을 대표하는 공교회적 친교의 가치들을 구체화해야만 한다.

 

결론

 

32.  이 자리는 내가 마지막으로 중앙위원회에 보고하는 자리이다. 거의 11년전, 내가 처음으로 총무의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WCC를 비롯한 에큐메니칼운동 전체가 전환의 시기에 직면해 잇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교회와 사회의 변화된 상황에 부응할 수 있는 WCC의 새로운 자기이해와 새로운 비전을 찾아 나가는 일을 촉진하기를 원했다. 내 에너지의 대부분은 이 과제에 집중됐으며, 여러 사람들이 공동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수행한 일들이 악화되는 재정상태로 인해 WCC의 기구적인 기능에 대해 갖는 의미와 함께 가려지게 되리라고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국면은 지나간 것이 분명해진 순간에 후임자에게 내 책무를 넘겨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위안이 된다.

 

33.  이 보고를 마치면서 임원과 동료들, 특히 실무자 리더쉽 그룹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나기 이 시기에 WCC에 봉사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여러분의 지지와 도전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은 특권이자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나의 임무와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여러분들 중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내가 공격을 퍼부었다거나 실망을 안겨 주었다면 이 자리에서 용서를 구한다. WCC의 삶과 에큐메니칼 운동에의 소명은 나의 사역에 있어서 거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헌신이 이자리를 떠난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이 일을 한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임무를 가장 직접적으로 담당한 사람들은 모든 일이 성공하기 위한 나의 진심어린 기도와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활동하는 순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완성으로 남겨 둔 것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

 

 

원문

 

http://www2.wcc-coe.org/ccdocuments2003.nsf

 

 

1) <역주> 하라레 총회 이후 첫 번째로 열린 WCC 중앙위원회는, 오는 2006년에 열릴 다음번 총회까지 WCC를 비롯한 에큐메니칼 운동이 집중적으로 모색해야 할 문제로 ‘교회로 바로 서기’(Being Church), ‘생명을 위한 돌봄’(Caring for Life), ‘화해의 사역’(Ministry of Reconciliation), ‘세계화에 대응하는 공동의 증언과 봉사’(Common Witness and Service amidst Globalization)의 네 가지를 설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1999 - Year in Review를 참조할 것. 이 문서는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으며, WCC 공식 홈페이지 중 http://www.wcc-coe.org/wcc/who/review-99.html에 수록돼 있음.

2) <역주> ‘Ecumenical Disability Advocacy Network’ 의 약자.

3) <역주> 여기에 삽입된 단락번호는 ‘An Interim Statement : A Church of All and for All’의 단락번호임.

4) <역주> 2003년 8월28일 오전에 있는 두 개의 성서연구를 말함.

5) <역주> 이 단락번호 역시 CUV 문서의 단락번호이다. CUV 문서의 한글 번역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홈페이지 www.kncc.or.kr 의 자료실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6) <역주> 이 단락번호는 ‘정교회의 WCC 참여에 관한 특별위원회’의 최종보고서 단락번호임. 이 보고서의 영문 전문은 http://www2.wcc-coe.org/ccdocuments.nsf/index/gen-5-en.html에서 볼 수 있음.

7) WCC 헌장 중 ‘기초’에 나와 있는 신앙에 대한 기본적 확언은 다음과 같다.

  “WCC는 성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자 구세주로 고백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한 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의한 공동의 소명을 함께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들의 친교이다”(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s a fellowship of churches which confess the Lord Jesus Christ as God and Saviour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therefore seek to fulfil together their common calling to the glory of the one God, Father, Son and Holy Spirit.)

 

번역/각주 : 민 성 식(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