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안기부 터 역사 보존을 위한 인권사회단체 기자회견이 25일 안기부 본관 건물 앞에서 있었다.
무소불위의 공포정치의 본산이었던 '남산 안기부' 옛터가 서울시의 방침에 따라 곧 유스호스텔로 바뀌려 하고 있다. 서울시는 8월말 사업자 선정공고를 하여 2005년까지 현재 안기부 본관 건물을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한다고 한다.
세계곳곳에는 과거 민족해방운동 현장과 민주화 운동의 현장 등을 생생하게 보존하여 역사 교육의 장과 관광 명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기념 공간이 사라지고, 민주화 운동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시피 하고 있다.
현재 남산 옛 안기부 터에는 전체 27개 건물 중 4개 동만 남긴 채 파괴되었으며, 고문실로 이용되던 지하 벙커가 현재 소방방재센터로 이용되고 있다. 다행히 안기부를 상징하는 본관 건물과 취조실로 이용되던 별관 건물은 남아 있다. 이들 건물 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어졌던 민주화 운동을 기념할 역사적인 현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권사회단체들은 서울시의 안기부 본관 건물을 인권기념공원으로 보존하자는 뜻을 밝히고자 기자 회견을 열게 되었다.
□ 일 시 : 2003년 8월 25일(월) 오전 10시
□ 장 소 : 남산 옛 안기부 본관 건물 앞 주차장
□ 순 서 :
- 사 회 :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인사 말씀 : 김용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 참석자 소개 및 인사
- 안기부 피해 주요 사례 발표: 조순덕(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
- 기자회견문 낭독: 오종렬(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공동대표)
- 향후 사업 계획 발표: 조승현 교수(민주주의법학연구회)
- 질의 응답
남산 옛 안기부 터를 인권기념공원으로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시와 폭력,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 민주화운동을 기념할 만한 공간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기억의 상실'이 당연시되어 가고 있으며, 민주와 인권을 향한 항쟁의 현장은 훼손되고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1972년 남산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선 이래 1995년 국가정보원이 내곡동으로 청사를 옮길 때까지 이곳 안기부는 독재권력의 본산이었습니다. 독재에 항거하던 많은 운동권 인사들, 정치인, 언론인, 문화예술인, 기업인, 교수 등이 이 곳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1973년 최종길 교수가 이곳에서 사망했고, 1974년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이곳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지옥의 고문'을 당했습니다. 1980년 계엄합수부에 의해 끌려왔던 민주인사들, 조작간첩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 1980년대와 90년대의 공안사건의 피해자들이 이곳에 끌려왔습니다. 눈을 가리운 채 끌려와 음습한 습기로 가득한 지하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이뤄진 것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공포에 의한 통치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이곳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탱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산 안기부는 독재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며, 그렇게도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끝내 민주항쟁을 성공시킨 역사와 결합된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역사일수록 철저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나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민족은 유태인 학살의 현장과 강제노동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역사의 교육장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중국의 남경 대학살 기념관,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관, 영국의 고문 박물관, 베트남의 타이거 감옥, 캄보디아의 뚜얼슬랭박물관 등은 모두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현장을 보존하고 그곳을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 놓은 세계적인 관광명소이기도 합니다.
국정원이 내곡동으로 옮겨간 뒤 서울시가 이곳의 건물 27동 중 23동을 해체하였습니다. 다행히 본관 건물과 별관 건물은 남아 있으나, 예전 고문실로 사용되던 지하벙커는 소방방재시설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없어졌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서울시는 본관 건물마저 유스호스텔과 청소년정보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8월말에 사업자 선정 공고를 내겠다고 합니다. 또한, 녹지대이기 때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서울시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곳을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못하였습니다. 그 동안 남산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 애써온 시민들의 노력으로 그나마 현재만큼이나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서울시에 요구합니다. 남산 옛 안기부 터를 민주주의와 인권을 기념하는 기념공원으로 보존합시다. 역사적인 기념공간은 상징성이 높은 현장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사를 기억할 공간을 꾸미고, 학생들이 찾아와 공부하고, 시민들이 찾아와 토론하고, 해외 관광객들이 찾아와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갈 수 있는 기념공원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에 명소를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현장을 한번 없애 버리면 이후에 복원하려 할 때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청계천 복원사업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우리 인권사회단체들은 서울시에 정중히 요구합니다. 안기부 건물을 유스호스텔로 사용한다는 방침을 유보하고 이곳 안기부 터를 보다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대화와 토론에 나서줄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인권사회단체들은 남산 옛 안기부 터를 역사 보존하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기념공원 안을 마련하여 서울시를 비롯한 정부, 국회에 우리의 뜻을 알려 나가고, 시민들에게도 우리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갈 것입니다.
"역사에 눈감은 자 미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군사독재권력의 탄압의 역사를, 그리고 끝내 그 탄압을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인권기념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장정을 시작합니다.
2003년 8월 25일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다산인권센터/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주주의법학연구회/불교인권위원회/사회진보연대/안산노동인권센터/원불교인권위원회/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인권실천시민연대/인권운동사랑방/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천주교인권위원회/평화인권연대/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18개 단체)
■ 서울시, 옛 안기부 본관 건물 공공 유스호스텔로 사용키로 결정
1. 2003.7.23. 서울시, 남산 공원내 옛 안기부 본관 건물에 대해 민자유치를 통해 공공 유스호스텔 로 탈바꿈시키기로 했다고 밝힘.
2. 서울시는 이에 따라 7월23일 민간사업자를 대상으로 공고를 내고 이후 제안서를 받아 타당성을 검토한 뒤 건물 리모델링을 거쳐 2005년11월 서울 유스호스텔(가칭)을 개관할 계획이라고 밝힘.
3. 서울시는 애초 본관 지상 1~3층은 유스호스텔로, 4~6층은 공원문화정보센타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본관 전체를 청소년 관련 시설로 사용키로 함.
■ 현재 남아있는 옛 안기부 건물 개요
1. 1991~ 서울시, 남산 내 옛 안기부 건물을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인수
2. 1996. 전체 27개 건물 중 23개 건물을 철거하여 공원으로 조성
3. 철거되지 않은 4개 건물은 본관, 지하벙커, 별관, 체육관으로
① 체육관 : 시민에게 개방되어 사용 중
② 본관건물(지하1층, 지상6층, 연면적1천972평) : 서울 시정개발연구원으로 사용했으나 이전한 뒤 건물 일부를 종합방재센타로 사용 중
- 건물 형태는 그대로 있으나 과거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음
- 본관에서 지하벙커로 연결되는 지하통로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듯 하나 들어가 볼 수는 없는 상태임
- 서울시는 소방방재본부로 사용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본관건물을 공공 유스호스텔로 사용키로 함
③ 지하벙커(지하3층, 연면적820평) : 소방방재본부에서 종합방재센터로 사용 중
- 과거 이른바 경범을 수사하거나 유치장으로 사용했던 장소라고 함
- 건물 전체에 종합방재 시스템에 들어서 있어 과거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음
- 누구나 방문하여 신청하면 내부 견학 가능
- 서울시는 현재 지하벙커에 들어선 종합방재센터도 소방방재본부의 추후 용산 신청사 건립 계획에 맞춰 이전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함
④ 별관건물(지하2층, 지상4층, 연면적2천215평) : 도시철도공사 연수원으로 사용 중
- 과거 안기부로 끌려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던 장소임
- 지상은 연수원으로 사용중이라 과거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나, 지하는 다른 시설물이 들어서지 않음. 수사실이나 그 밖의 시설 형태는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곰팡이가 심하게 낀 빈 공간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음.
- 2005년 6월 예정인 연수원 이전 후 녹지로 복원하거나 내구연한까지 공원시설로 사용할 계획임
■ 남산 내 옛 안기부터 관련 진행상황
1. 1995. 9. 25.
서울시, 남산 옛 안기부터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계획
2. 1996. 7. 19.
서울시, 남산 옛 안기부 청사 철거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한 후 1997.6까지 공원조성사업을 완료하기로 함
3. 1999. 5. 21.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창립(김상근 목사, 강만길 교수, 강문규 새마을운동중앙회 회 장, 권근술 한겨레신문 고문 등), 남산 옛 안기부터에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 추진키로
4. 2001. 3. 9.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위원장 이우정) 공청회를 열어 '민주화운동 희생자 묘역과 민주공원 조성 및 민주화운동 기념관 건립 등 민주화운동 10대 기념사업' 제시, 이중 민주화 유적지로는 남산 안기부터에서 시청앞 광장 분수대까지를 '민주화의 거리'로, 청계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를 '전태일로'로 조성하자는 안 등이 제기됨
5. 2001.
서울시, 남산 옛 안기부건물 지하벙커 820평과 시정개발연구원 건물 1층 및 지하 1층 일부 258평 등 총 1,078평에 2001.7.까지 재난통합관리체제 구축을 위한 서울종합방재센터를 청설키로 하고 시설 설치 작업을 진행중이라고 밝힘
6. 2001. 3.
남산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모임, "옛 안기부 건물을 도서관이나 유스호스텔로 용도 변경할 것"을 서울시에 청원
7. 2001. 4. 25.
남산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모임, "남산 옛 안기부 건물을 이 지역의 본래 취지에 맞게 공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서울시에 시민감사청구
8. 2001. 7.
남산을 사랑하는 시민의 모임, "옛 안기부 건물을 공공청사로 사용하는 것은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 청구
9. 2002. 3. 22.
서울시, 남산 옛 안기부 건물에 종합방재센터 개관(본관 및 지하벙커)
10. 2003. 3. 6.
남산을 사랑하는 시민의 모임, "서울시가 도시공원법상 아무 근거없이 옛 안기부 건물에 소방 방재본부 청사를 입주시켜 공공청사로 사용하려는 것은 헌법상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주거환경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에 '입주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제출
11. 2003. 3. 26.
이명박 서울시장, "도시공원법에 의하면 남산은 원래 도서관과 같이 시민들이 이용하는 시설만 들어서게 되어있다"며 공공기관에서 시민위주로 앞장서자는 생각에서 소방방재본부를 남산 옛 안기부 건물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유보했다고 밝힘
12. 2003. 5. 2.
서울시, 남산공원내 옛 안기부 본관 건물(현재 서울 시정개발연구원 청사)에 소방방재본부를 입주시키려던 계획을 철회, 유스호스텔과 공원문화정보센터 등 청소년 및 일반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키로 했다고 밝힘
13. 2003. 5. 23.
서울시, 남산 구 안기부 본관 건물을 민자유치를 통해 공공 유스호스텔로 사용키로 하고 2005년 11월 서울유스호스텔(가칭)을 개관할 계획이라고 밝힘
■ 7월 24일, 한겨레신문에 서울시가 남산 옛 안기부 터를 유스호스텔로 변경, 사용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보도된 이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민가협,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등의 관계자들이 모여 간담회 및 실무소위를 갖고 대책을 논의함. 이 논의에서 남산 옛 안기부 터를 유스호스텔로 사용하려는 서울시의 계획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역사 기념관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음. 이후 인권사회단체들의 기자회견 및 사회원로들의 서울시장 면담을 제안하기로 함.
■ 8월 14일, 오후 3시, 최열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가 서울시장을 면담함. 이 자리에서 최열 대표는 간담회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을 시장에게 전달하였음. 이에 대해서 이 시장은 사회원로 면담은 을지훈련 때문에 8월 25일 이후로 하여 연락하겠다고 하면서, 남산이 녹지로 묶인 상태라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어렵다는 의견을 표명하였음.
■ 8월 25일, 인권사회단체 남산 옛 안기부 터에서의 기자회견을 갖고, 제 시민사회단체에 공동대책기구 구성을 제안함.
<중앙정보부·안기부 주요사건 정리>
- 1973년 ~ 1980년까지, 중앙정보부 사건
- 1981년 ~ 1995년까지, 안기부 사건
1973.10.16. 최종길 사건
최종길씨는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과 관련하여 남산 중앙정보부 청사에 동생 최종선(당시 중앙정보부 요원)과 함께 임의출두 하여 조사 받던 중, 출두 3일만인 10월19일 중앙정보부 건물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이에 대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길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한다"고 결정.
1974.2.15. 울릉도 간첩단 사건
이 사건으로 구속된 이성희씨는 '전북대 교수로 일본에 유학하던 중 재일교포 이좌영에 포섭되어 북한에 다녀왔고, 귀국한 뒤에는 군 장성인 동생으로부터 미군철수문제 등에 대한 군사기밀을 탐지했다'는 혐의를 받음. 이씨는 고문과 체념에 의한 허위자백을 했다고 법정에서 호소.
1974.1. 장준하, 백기완 구속 사건
1974년 1월8일 유신헌법반대운동을 처벌하기 위한 대통령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후 첫 번째로 '개헌청원서명운동본부' 관련하여 장준하, 백기완 구속.
1974. 긴급조치 1호 성직자 구속사건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이해학, 김진홍, 인명진 목사 등 6명 구속.
이어 김동완, 권호경 목사 등 구속.
1974.4. 민청학련 사건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후 1,024명의 위반자를 조사, 180명 구속하면서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 '1973년 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계열,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세력과 결탁, 4월 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혁명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는 혐의.
1974. 인혁당 재건사건
중앙정보부는“도예종씨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 북한의 지령을 받아 당시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해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고 발표하고 1024명을 구속. 뚜렷한 증거도 제시되지 않은 채 75년 4월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20여시간 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사형이 집행됐으며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음.
1974.5.30. 중앙일보 편집국장 등 구속 사건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인호, 정치부장 이영석 등 5명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제37화 '진보당사건'과 관련하여 연행. 이 사건은 중앙일보사와 당국과의 타협을 통해 무마됨.
1975. 한승헌 변호사의 「어떤 조사」 사건
한승헌 변호사가 발간한 자신의 수상집 『위장시대의 증언』에 있는 '어떤 조사'라는 글에서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수 김규남의 사형집행에 대해 언급하여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을 찬양·고무하였다"는 혐의로 구속.
1975.4.11.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던 김상근, 이해동, 문동환 목사 등, 12일에 풀려났다가 14일 다시 출두하여 "그동안의 활동이 반공법에 저촉되는지 여부에 대해 조사" 받음.
1975.11.22. 재일동포유학생 사건
중앙정보부는 "북의 지령에 따라 모국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오던 백옥관 외 21명의 학원침투간첩단을 적발하여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고 발표. 이 사건으로 서울대, 한신대, 부산대, 고려대, 카톨릭의대 등 전국의 여러 대학에 걸쳐 김오자, 김철현, 김종태, 최연숙, 김명수, 김원중, 허경명, 이원이, 장영식, 강종건, 김동휘 등 수많은 재일동포유학생들이 검거됨. 이 사건 관련자들 역시 심각한 고문과 조작에 시달렸음을 주장.
1976.3.16. 김명식 시인의 <10장의 역사연구> 사건
서강대생 김명식, 박정희정권의 죄악상을 낱낱히 고발하는 내용의 시 '10장의 역사연구'와 관련하여 구속.
1976. 3.1. 3·1민주구국선언 사건
1978.1.15. 조상록 사건
1973년 국회의원선거에 순천에서 출마한 경력이 있는 조상록씨, 일본명치대학 대학원에 유학을 하던 도중 잠시 귀국한 사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간첩으로 발표됨. 그러나 조씨는 '일본에서 몇몇 아는 교포들과 만나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학비에 보태 쓰라고 하여 다소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며 '주일대사관 주최 신년회 등에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와 함께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경계, 통일에 있어서의 외세배격 발언 등이 자신이 간첩으로 몰리게 된 이유' 설명함.
17일동안 중앙정보부에 불법구금. 전기고문, 물고문, 집단 구타 등 참혹한 고문으로 고막이 찢어지고 이빨이 부러짐.
1979.4.16.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중앙정보부는 '불법지하 용공써클을 구성, 크리스찬아카데미에 입교하는 농민, 근로자,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중간집단이론 강의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등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변혁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실현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 이우재, 한명숙, 황한식, 장상환, 신인령, 김세균 씨 등 6명과 한양대 정창렬 교수를 구속. 그러나 이 사건에도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었고 학문의 자유가 유린되었다는 항의와 비난이 계속됨.
1980.5.17.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및 계엄합수부에 의한 민주인사들 대거 연행되어 고초를 겪음.
1980.8.20 석달윤 사건
1980.8.21 - 10.6까지 약 47일간 불법구금.
물고문, 통닭처럼 매달아 고문수사.
1981.3.7. 박동운 사건
1981.3.7 - 5.8까지 62일간 불법 구금
물고문, 성기고문 등을 당함.
증거가 없자 모든 증거를 '망치'로 때려 부셔서 버렸다고 조작, 망치가 유일한 증거물.
1981.4.경 손유형 사건
골프하러 한국에 오던 중 안기부에 연행된 손유형씨는 국내에 있던 가족들도 함께 연행되어 구속됨. 일본에서 유류절약용 첨가제판매회사를 경영하던 손씨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
1981.5.12. 김장길 사건
1970년 동경 엑스포 때 부친의 초청을 받고 도일, 일가친척도 만나보고 관광도 하고 부친으로부터 도장기계와 사업자금을 얻어 귀국하여 사업에 열중하던 김장길씨가 안기부에 연행됨. 김씨는 정식 구속영장이 발부된 그해 6월25일까지 약 45일간의 불법구금기간 동안에 "변호사에게조차 한동안 혐의사실이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하다가 처의 메모를 보고서야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을 정도"의 고문을 당함.
1981.12.6. 안승윤 사건
1981.12.6. - 82.2.26까지 약 62일간 불법구금
1982.3. 차풍길 사건
안기부에 연행된 차풍길씨는 66일간의 불법감금과 고문의 결과 간첩혐의를 뒤집어 쓰게 되었음. 차 씨는 1975년경 일본에 거주하는 아버지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하수구일등 막노동을 하면서 지냈으나 돈도 못 번 채 귀국하였는데, '7년 전 일본체류 당시 조총련 공작원에게 포섭 당한 뒤 귀국,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음.
1982. 김준보 사건
김준보씨는 일본거주 아버지를 만나러 1967년,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아버지에게 인사드리고 경제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 '조총련계인 아버지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내에 지하당을 구축하려 한 간첩'으로 만들어짐.
1982.12.10. 김장호 사건
재일교포. 51일 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구치소에 입소한 뒤에도 3번이나 안기부로 끌고가 검찰에서 부인 못하도록 협박함.
1983.3.10. 김성규 사건
제약회사 간부였던 김성규씨는 1980년 11월경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주선으로 일본 제약업계 시찰단으로 도일 중 자유시간에 잠시 육촌 누이내외를 만나 두 시간여 동안 점심을 함께 먹으며 가족의 안부를 전하고, 카메라, 양말, 시계 등 선물을 받고 돌아와 당숙모에게 전해준 일이 빌미가 되어, 안기부에서 59일간의 불법감금과 "필설로 형언키 어려운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간첩이 되었음.
1983.9.13. 정영 사건
약 40일간 불법구금
발가벗긴 상태에서 수갑을 채우고 전신구타 등 고문
1985.4.23. 김길욱 사건
성묘와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귀국하던 김길욱씨는 부산국제공항에서 입국 즉시 안기부에 연행. 40여일간의 불법구금과 고문 속에 자신의 범죄사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
1985.6. 구미유학생사건
- 김성만 :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 유학, 85년 6월 6일 연행, 60일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부모님께 보내는 유서까지 쓰게한 상태에서 고문수사
- 황대권 :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 유학, 62일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물고문, 성기를 책상위에 올린 다음 몽둥이로 내리치는 등 고문을 당함
- 양동화 :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 유학, 65일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검찰로 송치되기전 안기부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함.
- 강용주 : 전남대 의대 재학중, 35일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성기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등 고문 당함
1985.8. 민중교육지 사건
실천문학사에서 발행하는 부정기간행물 『민중교육』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씨와 필자 김진경(교사), 윤재철(교사) 등 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1986.7. 이병설 교수 사건
1973년 4월 일본문부성 초청 유학생시험에 함격하여 동경도립대학 기후학 박사과정을 이수한 뒤 1976년 귀국,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던 이병설 교수, 안기부로 연행되어 21일간의 불법감금과 고문 끝에 일본유학시절 조총련 공작원 김향술에게 포섭되어 잠입, 제자들에게 북한을 찬양하고 제자들을 포섭하는 한편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기소됨.
1986.7.15. 이병설 교수 간첩단 사건
유상덕(민주교육실천협의회사무국장, 전 성동고 교사)씨, "북한 공작원 이병설과 접촉, 「조선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재일조선인 교육론」, 「민족해방의 교육학」 등의 책자를 수령, 탐독, 보관해온 혐의"로 구속.
1987.9.4. 장의균 사건
안기부는 "민주화과정의 혼란을 틈타 정치권에 침투한 간첩 장의균 일당을 검거했다고 발표. 장의균씨는 한국고려사연구에 필요한 자료수집 등의 목적으로 도일하여 교토대학 우에다 마사하키 교수의 연사연구실 연구원 자격으로 있으면서 조총련계 인사들과 어울린 것이 간첩으로 몰리는 불운의 단초가 된 것임.
1988.5.3. 반제반파쇼한국민중전선 사건
안양노동상담소장 송운학, 배금주, 김점진 씨 등이 "노동계와 학원가에 침투, 좌경지하조직인 '반제반파쇼한국민중전선'을 결성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이적단체구성예비죄'가 적용되어 구속.
1989.4.12. 리영희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사건
리영희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한겨레신문 기자단의 북한방문 취재활동을 주선해주고 가능하면 김일성과의 인터뷰를 주선해 줄 것을 일본인 야스에료스케에게 부탁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지배지역으로 탈출할 것을 예비음모 하였다'는 이유로 연행.
1989.4.13.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1989.5.11. 평화연구소 사건
안기부는 평화연구소가 '반전반핵운동을 표방하는 이적단체'라며 조성우 소장과 김창수 연구조사부장을 구속.
1989.6.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사건
89년 6월26일 신구전문대 교수, 월간 『농민』의 발행인이며 민자통의 전 대변인인 김준기 교수가 구속되고 6월29일에는 민자통 상임의장 이현수, 대외협력위원장 이천재, 대의원총회 공동의장 박창균, 조직국장 이규영, 7월2일에는 대의원총회 공동의장 이종린 등이 차례로 구속. 안기부는 민자통이 대단한 이적활동을 전개한 '이적단체'로 발표했으나 막상 이들은 대체로 60대의 노인들인데다가 이들의 활동은 "결성대회 후 보증금 300만원짜리 사무소를 개설하고 회원들로부터 월회비를 징수하여 통일지향적인 성명서 네 건을 발표한 것이 전부"였음.
1989.6.27. 서경원의원 방북사건
1989. 카톨릭성직자들의 '불고지죄' 논란 사건
서경원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하여 서의원이 귀국 후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방북사실을 털어놓음으로서 김추기경과 당시 참석하였던 함세웅 신부 등에 대한 불고지죄 혐의를 두고 수사. 특히 함세웅 신부에 대해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방북추진과 관련, 북한쪽과 어떠한형태로든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함신부의 주변조사를 벌였"으나 고백성사에 가깝다는 이유로 입건은 하지 않음.
1989.7.2. 윤재걸 '한겨레신문'기자 불고지죄 사건
'한겨레신문' 윤재걸 기자,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실을 사전에 인터뷰과정에서 알고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행.
1989.7.30. 한미문제연구소 사건
안기부는 전민련 국제협력부 간사 고현주씨와 19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의 문부식씨, 그리고 전 고대총학생회장 김윤태군 등 3명을 평양축전 북한측 준비위와 전대협 간의 전문을 수신, 전달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이어 같은해 8월20일 전민련 국제협력국장 김현장, 김영애씨 부부가 구속되면서 위 사람들과 함께 한미문제연구소를 설립하려 했다는 혐의 추가.
1989. 임수경 방북 주선·지원·파견과 관련된 사건
1989.7.30. 북한측 평양축전준비위가 체코 프라하에서 전대협 앞으로 보낸 전문을 받아 전대협에 넘겨준 전민련 국제협력국 간사 고현주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989.8.3.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임수경에게 방북자금 250만원을 송금한 한양대생 김지선과 김씨를 전대협 간부들에게 소개해 송금을 도와준 유소정을 국가보안법상 편의제공 혐의로 구속.
1989.9.4. 임수경씨의 방북을 돕기 위해 전대협과 서독 내 반한인단체인 서독민협을 연결시켜준 김진엽씨를 국가보안법상의 편의제공 혐의로 구속.
1989.12.18. 임수경을 전대협대표로 평양축전에 보낸 전대협 의장 임종석 구속. 임씨는 전대협 산하에 평양축전준비위를 구성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적단체구성죄, 기자회견을 통해 평양축전참가를 위한 회담을 제안하고 북한관계자들과 전화통화한 것에 대해서는 반국가단체와의 통신죄, 임수경 북한파견에 대해서는 공모공동정범으로 탈출·잠입·동조죄 등 국가보안법의 제조항 적용.
1989.8.15. 임수경·문규현 방북사건
1989.8. 평양축전에 보낸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사건
안기부는 "1988년부터 서울, 전주, 대구, 부산, 광주 등 5개지역에서 갑오경장으로부터 현재의 조국통일운동기까지의 민중운동과정을 묘사한 「민족해방운동사」라는 대형걸개그림 11컷을 나누어 만든 뒤 이를 슬라이드필름에 담아 1989년 6월 미국 로스엔젤레스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축전 축하작품으로 북한에 보낸 혐의'로 홍성담씨를 구속. 이 그림은 5개 지역 민족민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 회원 30여명이 분담해 제작한 것으로 밝혀져 공동제작에 가담한 화가 차일환, 정하수, 백운일, 전승일씨 등이 연달아 구속됨.
1989.9.4. 귀국유학생 구속 사건
미국유학을 마치고 7월말 귀국한 박태훈씨, 1983년 1월 미국유학을 떠나 귀국할 때까지 재민한국청년연합 및 재미유학생단체 '석암회'에 가입, 미군철수 등을 주장해왔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1989.10. 북한기행문 게재 사건
황석영씨의 북한기행문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게재했다는 혐의로 『창작과비평사』 주간 이시영 구속. 당시 이 글은 『신동아』에 1·2회 게재되었으나 '창비'의 게재분만을 문제삼음.
1989.12.1. 이승환의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 사건
'이재화'라는 필명으로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를 집필하고 서울대 및 전남대 학보 등에 「항일무장투쟁사」에 관한 글을 기고한 혐의로 이숭환씨를 구속.
1990.1.17. 박태호의 사회구성체논쟁 사건
'사회구성체논쟁의 중심논객' 박태호(필명 이진경)씨, 1987년 집필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과 무크 『현실과 과학』제4집에 실린 「왜곡으로 빚어진 PD파의 오류와 무지가 연출한 NDR론의 복권」 및 1989년3월 서울대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 등이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제작으로 구속.
1990.1.23. 노동계급 사건
박태호(필명 이진경) 씨 구속된 후 이어 안민규씨가 연행되면서 2월12일 안기부가 사건전모를 발표. 안기부는 "지난해 3월부터 맑스·레닌주의에 입각, 남한사회주의 혁명투쟁을 위해 전국적 규모의 '혁명적 노동자계급 전위당'을 건설키로하고 서울, 인천, 부산 등 전국의 노동현장과 학원가 등에 기관지 『노동계급』을 제작배포해 왔다"고 발표. 구속된 두사람은 안기부에서 고문 등 불법수사를 받았다고 주장.
1990.11. 자주민주통일그룹 사건
1990.11.5. '통일노래 한마당' 사건
경희대 성악과 졸업생이며 전대협 간부를 지냈던 허정숙씨, 1990년 3월초 전대협 의장 송갑석군의 지시로 연세대에서 열린 '8·15 범민족대회성사투쟁'에서 '통일노래 한마당'을 개최하는 등 풍물노래패 등을 동원 문화행사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구속.
1990.11.10. 반미유인물 배포 사건
북한의 대남비방선전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구입, 배포했다는 혐의로 전 전대협 간부 전상현씨 등 3명을 구속.
1990.11.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건
1990년 11월29일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측·해외동포측과 함께 3자회담을 가지고 범민련을 결성한 다음 귀국하는 조용술, 이해학, 조성우 세 사람에 대해서 사전영장이 발부되어 11월30일 공항에서 곧바로 연행, 구속됨. 이어 범민족대회추진본부 본부장 이창복, 정책기획실장 김희택씨도 위 베를린 3자회담 및 범민련남측본부준비위원회를 개최, 구성하였다는 혐의로 1991년 1월24일 구속.
1991. 사노맹 사건 13명 구속
1992. 사노맹 사건 27명 구속
중부지역당 사건 57명 구속
김낙중, 손병선 등 6명 구속
1993. 김천태 사건
김삼석, 김은주 남매사건
황석영 방북 사건
1994. 구국전위 사건 6명 구속
남총련 투신국 사건 5명 구속
사민청 사건 9명 구속
안윤정 사건
1995. 박용길 장로 방북 사건
박창희 교수 사건
대종교 방북 사건 2명 구속
정민주, 이혜정 방북 사건
김동식 관련 불고지 사건 4명(박충렬, 허인회 등) 구속
범민련 사건 6명 구속
□ 사회원로 서울시장 면담 및 성명 발표
현재 서울시장과 면담을 추진 중임. 각계 사회원로들은 인권사회단체의 남산 옛 안기부 터 역사보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음. 이에 원로들이 이번 주중 서울시장을 면담하여 의사를 전달하고, 성명을 발표할 것임.
□ 시민사회단체와 공동 대책기구 구성
오늘 기자회견 직후 제 시민사회단체에 인권사회단체 명의로 공동대책기구를 제안하여 공식적인 대책기구를 구성할 것임.
대책기구를 통해서 제 시민사회단체의 역량을 모아 시민 캠페인과 언론 캠페인을 다양하게 전개할 것임.
□ 중앙정보부 및 안기부 피해자 증언대회 개최
1972년 이후 '남산'에서 고문 등의 피해를 당한 민주인사들이 피해자 당사자로서 남산의 역사성을 증언하고, 역사 보존을 요구하는 대회를 개최할 것임.
□ 국회, 청와대 등에 의견서 전달
이런 각계각층의 요구를 정부와 정치계에 전달하여 남산 보존의 여론을 적극적으로 형성할 것임.
□ 공청회 개최
남산의 역사보존에 대한 종합적인 계획과 청사진을 마련하여 제시하고, 서울시 관계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를 가질 것임. 특히 이 자리에는 지금까지 남산을 자연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온 시민단체들과 문화벨트를 추진하는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수렴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