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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 대화(한글)

입력 : 2003-04-14 07:10:46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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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종교간 Dialogue, Interfaith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적 전통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교회의 초창기부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유대적 정황에서 나왔다. 불가피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은 곧 그리스 로마 세계와 접촉하게 되었다. 유대적 혈통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종교 공동체 안에서는 그들의 공동적인 삶의 근거에 대한 논쟁이 터져 나왔다(행 15장; 갈2장). 로마서에서 바울은 신학적으로 유대적인 종교 전통과 그리스도교 신앙간의 관계를 규명하려 했는데, 그 당시 각기 구별되는 두 종교적 무리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다른 종교 전통에 머물고 있는 배우자를 두고 있는 이들에게 목회적인 권고를 하였다(고전 7:12-16).
초대 교회의 글들 역시 그리스도교적 확신에 근거해 있지 않은 종교적인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계시킬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 또한 대부분 다른 신앙 전통과의 갈등의 역사이다. 이 글의 범위를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과 이 운동에 의해 고무되고 그 틀이 형성된 종교간의 대화의 개념과 실천의 발전에 제한하기로 한다.

역사적 배경.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 대회는 일반적으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대회는 선교회와 소위 신생 교회들(17명의 대표만 왔다)로부터 온 1,2OO명의 대표에게 그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를 이루도록 요청하였다.
다른 종교 전통에 대한 이해와 관계에 대한 문제는 그 대회의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고,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선교적 메시지를 다룬 부문은 에든버러 대회에서 나온 모든 보고서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과의 만남에 대하여 언급했다. 예를 들면,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만날 때처럼 그리스도교적 자기 이해,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강한 주장이 그 대회의 전반적인 메시지 안에 우세하게 나타나 있었다.
에든버러에서의 토론은 비교종교학적인, 그리고 다른 신앙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관계를 규명하는 일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 시대에 파르콰르(Farquhar)의 <힌두교의 정수 The Crown of Hinduism>는 그 무렵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리스도가 힌두교가 그리던 동경과 열망을 성취했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 세계 선교 대회(예루살렘. 1928)가 열리기 전까지는, 다른 종교 전통을 향한 선교의 접근 방식에 대해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 유럽의 신학자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적 개신교가 성장해 가는 것(특히 미국에서)을 우려했다. 그들은 논쟁을 지켜보면서, 잠정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종교에 대한 생각을 지지하고 있었다. 또한 아시아의 종교와 관련하여 소위 "혼합주의적 사유"로 여겨지는 것이 그리스도교 선교의 중요성과 긴급성을 와해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관심도 있었다.
그러나 1928년의 예루살렘 대회는 동양과 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속화의 구름으로 덮여 버렸고, 세속화의 주제가 그 대회를 지배해 버렸다(참조. 세속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복음은 문제 많은 세상에 해결책을 마련해 준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종교들 안에 있는 "가치"를 확언하고, 세속적인 문화의 점증하는 충격에 맞서서 모든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인과 손에 손을 잡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몇몇 참석자는 다른 신앙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었고, 종교 전통 중에서도 그리스도교 복음은 독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록 그 메시지가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지긴 했지만(부분적으로는 월리엄 템플의 초안 작성 기술로 인하여),다른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태도는 예루살렘 대회 직후 대단히 논쟁거리가 되었다.
예루살렘 대회 이후의 논쟁의 핵심에는 호킹(W.E. Hocking)이 편집한 <평신도 해외선교 연구 평가 위원회의 보고서 Report of the Commission of Apperisal of the Laymen's Foreign Mission Enquiry>가 있었다. 이 보고서는 다른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배타적인 태도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도전은 다른 신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반종교적이고 세속적인 경향성에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너무나 많은 논쟁과 토론을 야기 시켰고, 선교 운동 본부에서는 자바(Java)에서 일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유명한 선교사이자 선교학자인 헨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를 불러, 다른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한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근거에 관하여 책을 쓰게 하였다. 크래머의 책 <비그리스도교적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 메시지 The Christian Message in a Non-Christian World>는 인도 마드라스의 탐바람에서 열린 1938년 세계 선교대회의 예비 교재가 되었다.
크래머는, 칼 바르트의 견해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근거한 성서적 신앙은 종교적 신앙의 모든 다른 형태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비록 온전하지 못한 방식이라 할지라도, 모든 종교 생활 속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을 알려는 시도를 통해서도 비추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면서도, 크래머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참된 통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바르트와 크래머는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의 독특성을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교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간적인 종교일 수 있음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의 계시가 실행되고 선포되는, 어디에도 필적할 수 없는 통로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독보적인 위치를 은밀하게라도 암시했던 셈이다.
크래머가 탐바람 대회와 그 이후의 선교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긴 했지만, 다른 이견들도 많았다. 호그(A.G. Hogg), 팔머(H.H.Farmer), 차오(T.C. Chao)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복음이 다른 종교 전통과 불연속성을 이룬다는 크래머의 견해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종교 생활과 체험 속에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양방향 교통"(two-waytraffic)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로서는, 하나님께서 지상의 나라들 속에 아무런 증인도 남겨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었다. 모든 참여자가 그리스도 사건의 특별한 계시적 성격에 대하여 동의했으나, 종교를 인간의 사유와 실천을 지배하는 "전체주의적인 체계들"이라고 보는 크래머의 종교관에 많은 이들이 거북함을 느꼈다.
탐바람 보고서가 크래머의 견해에 너무 기울어진 감이 있긴 하지만, 그 보고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적 전통의 계시적 성격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긴급한 숙고와 연합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도 기록하였다.

탐바람 이후의 발전.
탐바람 대회 직후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였고, 다른 문제가 선교 운동의 주목을 끌었다. 일단 전쟁이 끝나자 국제 선교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는 다시금 다른 신앙전통과의 관계에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변해 있었다. 민족주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을 휩쓸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종교적 전통의 부흥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와해된 세상 안에서 자신들의 하나됨을 표현할 필요를 자각한 교회들은 1948년 WCC를 형성하기 위하여 암스테르담에 모였다. IMC와 WCC의 전도부는 다른 신앙에 대하여 매듭짓지 못한 탐바람 논의를 지속시키는 데 열심을 냈다.
채택된 전략 중의 하나는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 가운데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연구 센터를 세계 각처에 세우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략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살아 있는 신앙"에 대한 장기간의 공동 연구였는데, 이 연구는 탐바람 논의의 "연속성-불연속성"의 양극성을 넘어서는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모든 초점이 아시아에 쓸렸다. 데바난단(Paul Devanandan), 나일스(D.T. Niles), 쿨렌드란(Sabapathy Kulendran) 같은 이들이 이 주제를 탁월하게 소화해 낸다. WCC 뉴델리총회에서 행해진 데바난단의 연설은, 신생국 속에 있는 신생 교회의 경험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신생 교회는 한편으로는 일하고, 한편으로는 국가 개념을 형성 중인 다른 종교 전통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싸워야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다른 신앙 전통을 지닌 사람과 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하여 진술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대화 개념이 나왔고, 이는 뉴델리 총회 선언문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 총회에서 IMC는 "세계 선교와 전도부'(후에 위원회가 됨, CWME)로 WCC 안에 통합되었다.
대화의 개념은 1963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CWME 제1차 회합에서 더욱 깊이 숙고되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논의가 1964년 방콕에서 열린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협의회(지금은 아시아 기독교 협의회)에서 있었다. "다른 신앙의 사람들과 그리스도교의 만남"에 대한 그 회의 선언문은, 다른 신앙과의 관계 속에 있는 아시아에 관한 여러 가지 재고(再考)를 담고 있다. 이 선언문은 여러 측면에서 탐바람 논쟁을 넘어섬으로써, 다른 신앙에 대한 에큐메니칼 사상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는 일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1967년 스리랑카의 캔디(Kandy)에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여러 측면에서 종교간 대화의 발전에 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 회합은 WCC 안에서 종교간 대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의 시작을 알리는 전환점이었을 뿐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사무국" 소속인 로마가톨릭 교회의 고문들이 처음으로 논의에 참가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크래그(Kenneth Cragg)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개신교 사상을 상당히 지배해 온 바르트-크래머식의 종교관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 내의 발전.
다른 종교에 대한 신학적 경향성에 있어서, 개신교와 로마가톨릭 교회 사이에는 몇 가지 중요한 상이점이 있었다. 개신교 선교는 그리스도론과, 구원의 길로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응답의 필요성에 엄청난 강조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신앙에 대한 태도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응답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중립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으로 인해 복음의 메시지를 세계 만방에 전해야 한다는 긴급한 느낌을 가져온 것이다.
로마가톨릭 신학은 그 강조점을 교회론에 두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대가 없는 선물이다.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로 이 신앙을 표현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구원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교회는 모든 인류에게 합당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징표요, 성례인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개념을 통해, 로마 가톨릭의 신학은 교회의 일원이 명백히 아니었던 이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역 이전에 살았던 이들과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가톨릭 신학은 "함축적인 믿음"(implicit faith), 혹은 "의도에 의한 믿음"(faith by intention)이라는 사상을 발전시킴으로써, 단지 특정한 시간 혹은 장소에 태어난 까닭으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이들이 아무도 "길을 잃지" 않게 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신비한 것이다. 의도만으로도 유월절 신비의 성례에 참여하는, 즉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1960년대에 두 명의 특출한 가톨릭 사상가, 프랑스 추기경 다니엘루(Jean Danielou)와 독일인 신학자 라너(Karl Rahner)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그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긍정적인 발전을 보인 다른 신앙에 대한 문제에 신학적 의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WCC 안에 있는 많은 교회, 그리고 WCC 자체와 마찬가지로)유대인과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그와 같은 입장이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견지하면서 교황 바오로 6세는 비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위한 사무처(비그리스도교 사무국)를 만들고 그 첫 책임자로서 마렐라(Paolo Marella)추기경을 임명했다. 교황의 회칙인 <자기 교회 EcclesiamSuam>는 그리스도인과 다른 신앙 전통에 선 사람간의 적극적인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65년 10월 28일에 공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언문 교회와 비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언급하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rate)은 이러한 관계를 교황의 차원에서 명확히 밝혔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과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등 다른 주요한 바티칸 문헌들도, 다른 종교 전통의 사람들과의 대화에 대한 중요한 언급을 담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신학적 입장을 명백히 전개시키지는 않았지만, 종교간 대화의 문을 개방함으로써 로마가톨릭 교회와 다른 신앙의 사람들의 관계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캔디 회의(이 모임의 준비 자료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estra Aetate]과,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의 일부분을 포함하였다)는 논쟁점 중의 몇 가지를 해명하였을 뿐 아니라, 대화를 종교간의 관계를 위한 가장 적절한 접근 방식으로 확증하였다. 비록 이 회의에서 얻은 내용이 웁살라 총회(1968)에 공식적으로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총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 총회 이후에 CWME는 사마르타(Stanley J. Samarta)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살아있는 신앙"에 대하여 밀도 있게 연구하도록 요청했다.
이 연구의 전개에서 나타난 하나의 전환점은 WCC 후원 하에 제일 처음 열린 "다원적 신앙의 대화"(Multifaith dialogue) 모임이었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참여자들은 1970년 레바논의 아잘톤(Ajaltoun)에 모여 종교간의 대화에 대하여 협의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대화를 실제로 나누었다. 두 달 후 취리히에서 열린 WCC 협의회는 아잘톤 대화의 경험을 신학적으로 평가했고, 1971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에서 모인 WCC 중앙위원회는 그 토대를 가지고, 사마르타를 의장으로 하는 '살아 있는 신앙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라고 하는 새로운 서브 유니트의 기초 문서가 된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화 논쟁.
바티칸의 비그리스도교 사무국과 WCC 대화국의 설치는, 교회 생활에서 종교간 대화의 전망을 넓혀 주었다.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은 종교간 대화를 촉진하는 자료를 발간하였고, 각 지역에서 그리스도인과 다른 이들 간의 협력을 고무시켰다. WCC 대화국은 유대인,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과의 쌍방대화 모임을 마련하였고, 종교간 대화의 의미와 중요성을 밝히려고 했다.
기본적으로 종교간 대화는 상호 신뢰와 수용의 분위기 속에서, 상이한 신앙 전통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만남으로서 이해되었다. 대화란 한 입장의 고유한 종교적 확신에 대한 정당화를 포기하거나, 감추거나, 추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분열된 세계에서 공동체적 삶과 공통된 인간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전통에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었다. 대화는 다른 이들의 신앙에 관한 정보를 얻는 과정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신앙 전통의 본질적인 차원을 재발견하려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공동선을 위하여 함께 일할 새로운 가능성뿐 아니라 역사적 편견과 적대감을 제거하는 유익함이 인식되었고 확증되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윤곽 안에서 이루어진 신학적 탐구들로 인해 다양한 관점이 생겨났다. 어떤 이들은 대화를 기본적으로 다른 이에 대하여 배우고 존중할 수 있는, 그리고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 할 수 있는 새롭고도 창조적인 관계로 보았다. 다른 이는 대화를 종교 전통의 발전 가운데서 중차대한 역사적 계기로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든 신앙 전통은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도전 받고 변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들은 대화를, 진리를 향한 공동의 여정으로 보았다. 이 여정을 통해 각자의 전통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진리에 대하여 인식하고 응답해온 고유의 방식을 함께 나누게 된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대화의 실천은 그리스도교 선교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신앙에 대한 신학적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의구심이 WCC 제5차 총회(나이로비 1975)의 공개 토론회에서 드러났다. 이 총회에서는 대화국이 첫 보고서를 내었고, 최초로 다른 신앙인 5명이 특별손님으로 초대되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추구하며"라는 주제로 토론하는 3분과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대회의 문제가'논의되었다. 이분과의 보고서에 대한 총회 본회의의 논의는, 대화 문제에 대한 각 교회의 이견을 드러냈다. 어떤 이들은 대화가 1928년 예루살렘 대회에서 경계한 일종의 혼합주의를 낳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의 독특성과 궁극성을 옹호하려 했고, 어떤 이들은 종교간의 대화에서 일종의 선교적 위협을 지적했는데, 이 문제는 교회 자체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로 여겨겼다. 탐바람 대회에서처럼 여러 가지 견해가, 특히 아시아의 견해가, 대화를 다원적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들을 위한 가장 적절한 방식이라고 옹호하였다. 그 본회의는 그 보고서를 초안 작성 그룹에게 반송했는데, 여기에서 본 회의의 토론에서 있었던 망설임을 표현하는 서문을 첨가시켰다.
그러나 나이로비 총회는 종교간 대화의 본질, 목적, 한계를 좀더 명확히 규명해야 하며, 아울러 혼합주의, 토착화, 문화, 선교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하여 더욱 세밀한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그 토론을 평가하면서 WCC 중앙위원회는 이 총회에서 제기된 문제를 좀더 잘 규명할 권한을 한 주요한 신학 협의회에 부여하였다. "공동체 안에서의 대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1977년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열린 이 회합은, 다른 이들과의 공동체를 추구할 그리스도교의 근거를 규명하는일과, 다원적 상황 속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일련의 타협 없이 그리스도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봉사와 증거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나의 지침서를 작성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이 협의회의 성명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 무엇이 공동체인가? 무엇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특징인가? 왜 우리는 대화에 참여해야 하는가? 대화란 그리스도교 선교를 등지는 일종의 배반인가? 그 모임은, 대화란 선교에 대한 배반이나 개종의 '비밀 병기(兵器)"가 아니며, "오늘의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한 방식임을 확인하였다. 이 치앙마이 회합은 1979년 WCC 중앙위원회로 하여금 "대화의 지침서"를 만들게 했고, 각 교회에게는 이를 연구하고 실천할 것을 촉구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WCC 안에 있었던 것과 유사한 문제가 있었다. 다른 신앙의 사람들과 적극적이며 우호적인 관계를 전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그리고 상호 이해와 협력을 위한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에 대해, 모두가 동의했다. 그러나 사무국의 본 위원회는 가톨릭 교회 전체가 볼 수 있도록 대화의 목적과 목표를 다루는 지침을 작성해야 했다. 선교와 대화의 관계는 가톨릭 교회의 논의에서도 역시 항구적인 문제로 남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대화와 선교란 교회의 합당한 행위로 인정되었다. 초기의 지침은 대화를 선교적 봉사에 넣기를 꺼려했었다. 이는 가톨릭 교회와 WCC 몇몇 회원 교회가 주장한 견해였다. 바티칸에서 나온 대화에 관한 성명서는, 대화의 신학적 기초에 대한 가톨릭 교회 자체 내의 불일치로 인하여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야 했다.
1984년 2월 협의회 본회의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표명한 안이 나왔는데, 이 안의 제목은 '타종교 및 이데올로기와의 대화를 위한 지침: 대화와 선교에 대한 성찰과 안내"였다. 이 성명서는 나이로비 보고서의 서문처럼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신앙의 사람들과 대화하도록 권고했다. 그런데 대화와 선교의 관계를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하는 압력이 대단히 컸기 때문에 이 성명서가 선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사무국은 특히 "대화와 선포"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교회 내의 대화.
신학적인 문제가 계속 논의되는 동안, 대화 활동은 점점 더 지역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교회가 종교간의 요소를 포괄하는 에큐메니칼 문제를 다루는 부서를 강화시켰다. 몇몇 교회와 협의회는 종교간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간사진을 채용하기도 했다. 지역적, 국제적, 종교간 협의회의 수가 늘어났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송 매체의 관심을 끈 사건, 즉 모든 수도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평화의 기도를 위해 1986년 아시시(Assisi)에서 함께 모이자고 요청함으로써 종교간의 기도에 대한 관심의 불길이 일어났다.
오늘날 종교간 대화는 여러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원적인 모든 상황에서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가 있다. 의도적인 대화 혹은 담화를 통해 사람들은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견해를 주고받는다. 학문적인 대화도 있고, 기도와 명상을 강조하는 소위 영적인 대화도 있다. 예를 들면, 선원(禪院)과 베네딕토 수도회는 피차의 명상법을 배우기 위해 수도사, 수도승을 매년 교환하고 있다. 인도에는 다른 이들의 기도의 삶을 보고 또 공동 기도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전통의 사람들이 모여 주말을 함께 보내는 과정이 있다. 종교간의 대화와 다원론의 도전에 관한 책과 소책자들도 많이 나와 있다.

지속적인 에큐메니칼 관심사로서의 대화.
대화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영향력은 WCC 제6차 총회(밴쿠버, 1983)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다른 신앙을 가진 초청 인사가 15명이었고, 그 중 4명은 본회의의 발제에 참여했다 종교간 대화는 총회 프로그램에서 때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분열된 세계 안에서의 증언" 분과에서는,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별다른 심각한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 이웃의 종교적인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보고서의 진술에 많은 참여자가이의를 제기했고, 이와 맥을 같이하여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에 관한 대단한 논쟁이 있었다. 다른 종교적 전통들도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수단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뜨겁게 토의되었다.
밴쿠버의 경험을 '평가하면서, WCC 대화국은 종교신학 문제를 일련의 연구를 위한 중요한 문제로 보았다. 토론의 출발은 교회 속에서 "내 이웃의 신앙과 나의 신앙-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신학적 논쟁들"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18개 언어로 번역된 소책자의 반응을 살피면서 4년 동안 계속된 연구는 교회 안에서 다원성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신학적으로 어떻게 다른 신앙 전통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WCC의 제7차 총회(캔버라 1991)를 위한 준비는 종교신학에 대한 주요한 협의를 포함시켰다. 1989년 미국 샌안토니오(San Antonio)에서 열린 WCC 세계 선교 대회는 최초로, 선교 대회에 다른 종교의 고문을 두었으며, 다른 신앙의 사람들과 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주요 논제 중 하나였다.
논쟁적 성격을 가진 사안으로서 종교간의 대화는 에큐메니칼 가존 공동체)내에서 근원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남을 것이다. 종교간 대화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제기하는 도전은 광범위하다. 이는 교회로 하여금 다른 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자기 이해를 추구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이 문제는 다원성의 현실을 다룰 수 있는 좀더 깊은 자원을 찾아야 할 필요성과, 선교와 복음 증거를 향한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교회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참조. 구원 그리스도의 독특성; 선교; 중교; 하나님; 혼합주의
S. WESLEY ARIARAJ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