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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장애인주일 공동설교문

입력 : 2003-04-11 05:16:08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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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장애인주일 공동설교문

한 손 마른 사람과 예수의 마음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소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느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마가복음 3:1-5)

올해도 어김없이 장애인 주일을 맞이합니다. 1981년 제정된 장애인의 날은 올해도 변함없이 실시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일년 365일 가운데 364일은 비장애인의 날이고 4월 20일만 장애인의 날이 되었습니다. 방송과 언론에서도 집중적으로 4월 한 달에 걸쳐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각종 시상 프로그램을 편성하지만 대체로 사회에서 바라보는 장애인에 관한 시선은 평범한 한 인간으로 보기 보다는 불쌍한 사람, 동정의 대상 정도로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세계적으로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서너 집 건너 한 가정씩 장애인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현실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과연 한국에는 장애인들이 별로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한국에 사는 장애인들은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의 72.5%가 일주일에 닷새도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에 갇혀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최근 불거진 장애인들의 주장은 바로 이동권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장애인들이 버스와 지하철에서 쇠사슬과 사다리로 목을 걸고 절규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는 모습들은 여전합니다. 장애인들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편의시설도 문제이지만 장애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문제에서 출발합니다. 장애인의 52.3%가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입니다. 요즘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정부는 의무교육제도를 통해서 장애인도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 해 놓았지만 장애인들이 학교를 가려고 해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마음놓고 교실을 오가며 수업 받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조성 되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저학력의 악순환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학력은 단순히 인간답게 사는 교양의 수준이 아닙니다. 학력은 사회 계층으로 나아가는 관문이기도 하고 때론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회가 주어지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의 저학력은 최소한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매김도 보장되지 않는게 현실입니다. 때문에 장애인은 장애와 경제력 등 이중 삼중의 고통을 대물림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매시간 뉴스와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이라크전쟁 소식은 바로 장애인의 양산을 뜻하고 있습니다. 선천적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 즉 사고로 인한 장애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전쟁으로 무참히 죽어가거나 다친 그들은 장애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참혹한 죽음과 함께 장애인을 대량생산하고 있습니다.


올해 참여정부는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했습니다. 참여정부가 장애인 정책을 지나치게 경제적 논리로 접근한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물론 장애인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경제적 논리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장애인을 특수 집단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의 측면에서 전 국민이 함께하는 사회를 위한 인식의 전환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 입니다. 그래야 정말 장애인들도 참여하는 정부가 될 수 있습니다.

2003년 장애인주일을 맞으며 한국교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대해 각성해야 합니다.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왔고 장애를 도구화 했습니다. 장애인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설 수 있는 자리를 박탈했습니다. 때문에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게 했고 장애인들에게도 스스로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장애인을 동등한 인간,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닌 당당한 자연인으로 장애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올해 장애인의 날은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선포하신 부활절과 같은 날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부활절 축하예배를 계획하고 있지만 매일 3천톤 이상의 폭탄이 지구 반대쪽에서 퍼부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부활의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는 한 손 마른 사람을 보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사람을 고치면 자신이 어려운 일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해방시키는 사역을 하십니다. 당장 손마른 것을 고치지 않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하루 이틀 지나서 고칠 수도 있는데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 마른 장애인은 평생동안 고통을 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소망하는 한가지 소원 그것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예수는 어려운 모함을 받더라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이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많은 일중에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까? 신비한 기적을 통해서 권력자가 되려고 하신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대부분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하여 예수는 그 대가로 칭송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셨는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힘든 일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사역의 상당부분을 장애를 해방시키는 일에 힘을 쏟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장애인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거리로 나서고 있습니다. 정부를 향하여, 사회를 향하여 분노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라보는 교회는 어떤가요. 우호적이고 진정한 안식처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머지않아 그 분노가 교회로 향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한 영혼을 천하보다 사랑한다고 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먼저 장애인들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왜 우리교회에는 장애인들이 없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 장애인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없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면 당연히 교인의 10%도 장애인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교회에는 장애인들이 안보이는 걸까요? 바로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에 문제가 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시설이 없습니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점자성경·자료, 수화통역 등 필요한 내용들을 장애인이 있건 없건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각 부서와 조직에도 장애인이 참여하도록 정책적으로 교회의 제도를 바꿔야 합니다. 장애인만의 별도의 교회, 별도의 부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 함께하는 모습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편의시설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동들에게도 필요한 필수적인 것입니다. 시설을 마련하지 않고 장애인을 오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는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해야 할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지 결코 '구제의 대상'만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배우고 그들도 우리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건강하다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차별당하는 일 없이 서로의 약한 부분을 세워주며 협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고통받는 자, 버림받은 자의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던 장애인들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며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남의 일이라고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와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깨뜨리고 한 인간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의미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소망입니다.